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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메타이코노미 Mar 27. 2022

언제부터 암호화폐에서 백서란 말이 사용되었을까?

암호화폐백서읽기 01


내 기억으로는 사토시 나카모토(Satoshi Nakamoto)가 2009년에 공개했던 「비트코인: 개인 대 개인 전자 화폐 시스템(Bitcoin: A Peer-to-Peer Cash System)」은 그 당시에 논문이라고 불렸다. <그림 1>에서 보듯이 문서의 형식으로 보면 논문의 구성 요소들을 모두 갖춘 9페이지 분량의 글이었다. 논문이 동료평가를 거쳐 공신력 있는 저널에 게재되어야 한다면, 사토시의 글은 암호화를 전문 주제로 하는 메일링 리스트에 올려졌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그런데 최근에 사토시의 글을 인용하는 블로그들을 보면 그 글을 비트코인 백서라고 부르고 있다. 아마도 코인을 발행하려는 사람들이 암호화폐공개(ICO)를 앞두고 투자자를 모집하기 위해서 작성한 문서들을 백서라고 부르기 시작하면서, 사토시의 논문도 백서로 불리게 된 것 같다. 그렇다면 백서라는 이름으로 출판물을 만들고 발행된 최초의 코인은 무엇이었을까?


이에 대한 답은 쉽게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주요 코인의 발행 순서대로, 코인의 백서들을 검색해보았다. 검색해보면 다소 흥미로운 결과가 나오는데, 2012-14년까지 발행되었던 코인 대다수는 비트코인의 사례를 따라 논문 형식으로 작성되었다. 예외적으로 최초로 ICO를 추진했던 마스터코인(MasterCoin)의 경우 버전 0.5에 해당하는 문서의 제목이 「두 번째 비트코인 백서(The Second Bitcoin Whitepaper)」였다. 그 이후에 버전 업데이트를 거쳐 2013년에 이 문서의 최종 제목은 「마스터코인 완벽 사양 ver. 1.1(MasterCoin Complete Specification)」이 되었다. <그림 2>에서 보듯이 마스터코인에서 백서라는 단어가 사용되기는 했지만, 요즘 발행되는 백서처럼 멋진 표지를 단 문서는 아니었다. 게다가 문서의 부제를 보면 “공개 논평을 위한 초안”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0.5 버전에서의 백서는 투자자를 모집하기 위한 마케팅 용도로서 발행된 문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아이디어를 공개적으로 검증을 받고 개선하기 위한 용도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012-14년도의 백서들을 보면,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리플(Ripple) 역시 <그림 3>에서처럼 비트코인의 문서 형식을 따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토시가 만들어 낸 것은 블록체인 기반의 암호화폐일 뿐만 아니라, 논문 형식의 출판물을 특정한 지식을 공유하는 전문 커뮤니티(암호화 메일링 리스트나 Github 등)에 공개하는 관습이기도 하다. 문서가 논문 형식이면서 특정 커뮤니티를 대상으로 발행되었다는 것은 일반인을 독자로 상정하지 않았다는 뜻이고, 기술이 사회적으로 어떻게 수용될 수 있는가에 대한 고려가 없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발명가나 엔지니어가 자신이 개발한 기술이 사회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는지 스스로 알 지 못 했던 사례들은 너무도 많다(에디슨은 자신이 개발한 축음기가 법원에서 속기사를 대체하는 용도가 될 것이라 생각했다). 어떤 기술적 대상에 대한 아이디어(원형)은 다수의 경로를 통해 사회화가 되는데, 블록체인과 암호화폐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백서라는 단어의 등장 자체가 그 기술적 원형이 기존에 사회화된 제도들을 참조하고 인용해서 분화되기 시작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마스터코인의 개발자가 왜 백서라는 단어를 썼는지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을 찾지 못 해서 그 정확한 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 IPO라는 주식 시장에서의 관습에서 사용하는 문서인 백서를 그대로 차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는 암호화폐가 화폐로서의 기능뿐만 아니라 증권으로서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 대한 발견이기도 할 것이다.



2012-14년은 논문 형식에서 백서 형식으로 문서 형식이 변화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과도기였다(이는 거래소의 성장과 연동되어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추후 검토가 필요하다). 그렇다고 해서 2014년 이후부터 백서가 주도적인 형식이 되었다는 뜻은 아니다. 여전히 암호화폐를 발행할 때 논문 형식을 따라 문서를 발행하는 전통이 남아 있다. 다만 이 문서들을 백서라고 지칭하는 데서, 문서를 지칭하는 개념이 달라지고 그에 따라 문서의 작성 의도가 달라지며 문서를 읽을 것이라고 추정되는 독자층이 달라진다는 의미이다. 즉 코인을 발행할 때 작성하는 문서의 사회적 기능이 달라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사토시가 논문 형식으로 비트코인 문서를 작성했던 것으로 미루어 짐작해볼 수 있는 것은 그(그녀 혹은 그들)가 전문 엔지니어이고 그에게 친숙한 문서 형식을 택했을 뿐이라는 점이다. 이후 발행되었던 주요 코인들의 문서 형식도 논문인 이유는 문서 작성자가 개발자와 동일한 사람으로 그들에게 익숙한 문서 형식을 택한 결과라고 이해해도 좋을 것 같다. 다만 백서라는 단어가 등장하고, 백서 형식에 맞추어진 문서가 발행되면서 개발자 이외에도 법률가, 마케팅 전문가 등이 문서 작성자에 추가되기 시작했고 그와 함께 암호화폐의 사회적 기능 역시 구체화되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암호화폐 문서 형식 관련해서 한 가지 주의가 필요한 점은 백서가 아카이브된 사이트에서 최근에 업데이트된 백서를 올려놓기 때문에, 그 문서가 최초의 버전이라고 오해하면 안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2013년도에 발행되었던 그리드코인(GridCoin)은 아카이브 사이트에서 <그림 4>의 왼쪽과 같이 최근에 발행되는 백서와 같은 형태인데, 원래 발행되었던 문서 형식은 <그림 4>의 오른쪽과 같이 논문 형식이었다. 분산 컴퓨팅으로 과학 연구들을 지원하기 위해 발행되었던 그리드코인마저 이와 같은 문서 형식의 변화를 거쳤다는 점은 암호화폐가 어떤 과정을 거쳐 사회화된 것인지를 시각적으로 잘 보여주는 사례 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metaecon.io 에 연재하고 있는 글을 재게시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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