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장실을 부수고, 그 자리에 주민의 일상을 심다

사무장의 차가운 경고보다 후배의 미소를 믿기로 했던 그날

by 공무원 덕림씨

"아직 시작 안 했으면, 절대 하지 마세요."


2002년, 나는 한도시의 신설 부서인 ‘주민자치기획단장’으로 발령을 받았다. 정부가 읍면동 사무소를 주민자치센터로 전환하겠다는 정책을 내놓은 지 5년이 지났지만, 현장의 반발에 부딪혀 한 발자국도 떼지 못하던 시기였다. 지도·단속 업무는 본청으로 이관하고 읍면동은 민원, 복지, 자치 기능만 남기라는 정부의 방침을 어떻게 현장에 이식할 것인가.


나는 막막한 마음을 안고 시범 운영 중이라는 경기도 ㅇㅇ시의 한 동사무소를 찾았다. 5시간을 달려간 그곳에서 나를 맞이한 50대 베테랑 사무장의 첫마디는 인사가 아닌 냉소적인 ‘명령’이었다. 멀리서 온 후배 공직자에게 던진 그 한마디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더 이상 대화를 이어갈 용기가 나지 않아 현관 앞에 멍하니 서 있을 때, 30대의 젊은 여직원이 조심스레 말을 걸어왔다.


“단장님, 여기 정말 대단해요. 본청에 있다가 승진해서 왔는데, 예전 이동사무소 시절엔 하루에 몇 명 오지도 않았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매일 250명이 넘게 찾아요. 제가 얼마나 즐거운지 몰라요. 이건 반드시 하셔야 해요!”


노련한 사무장의 ‘현실론’과 젊은 직원의 ‘생동감’. 귀청 하는 차 안에서 나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누구의 말을 믿어야 할 것인가. 결국 나는 여직원의 그 빛나는 눈동자를 믿기로 했다.


1. 커튼이나 바꾸는 ‘화장’은 거부한다


나는 정부 자료집을 꼼꼼히 학습하며 전략을 짰다. 정부는 동당 7,000만 원의 리모델링비를 지원하며, 15~20명이던 직원을 7~10명으로 줄여 남는 공간을 주민 커뮤니티 공간으로 전환하라고 요구하고 있었다.


하지만 벤치마킹에서 본 현실은 처참했다. 대부분은 그 귀한 돈으로 사무실 커튼이나 책걸상등 사무용품을 교체하는 ‘생색내기’에 그치고 있었다. 진짜 주민을 위한 공간은 어디에도 없었다. 나는 정면 돌파를 선택했다. 관내 건축가들과 협의하여 동사무소마다 전담 설계사를 지정하고, “어디에도 없는 차별화된 설계”를 요구했다.


권위의 상징인 ‘동장실’을 과감히 없애버렸다. 줄어든 직원들의 책상을 몰아넣고 남은 공간에는 작은 도서관, 체력단련실, 요가 교실, 커뮤니티 공간을 필수적으로 채웠다. 공간이 부족하면 증축을 해서라도 주민의 터전을 확보했고, 시설물은 최고 현대식을 고집했다. 동사무소 간판조차 격식을 벗어난 세련된 디자인으로 바꿔 관공서의 냄새를 지워나갔다.


2. "왜 공교육을 시민단체에 맡깁니까?" : 인식을 뒤집는 교육


공간이라는 '하드웨어'보다 중요한 것은 사람이라는 '소프트웨어'였다. 나는 전 읍면동을 순회하며 공무원과 통·반장을 대상으로 교육을 시작했다. 나는 강사진을 관료가 아닌 YMCA 등 시민단체 활동가들로 구성했다. 동사무소를 주민에게 돌려주는 사업인 만큼 주민의 언어로 소통하는 이들이 적임자라 믿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일부 간부들은 "왜 공교육을 시민단체에 의뢰하느냐"며 나를 호되게 질책했다. 하지만 나는 주민의 마음을 여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했다. 교육은 치열했다. 공무원들에게는 권위를 내려놓는 법을, 주민들에게는 이 공간의 주인으로서 '시민공사감독관'이 되어 현장을 지키는 법을 가르쳤다. 공사가 지연될 때는 ‘지연배상금’을 철저히 따지며 주민의 권리를 지켜내는 법도 함께 익혀나갔다.


3. 아침부터 울리는 장구 소리, 그리고 비난


마침내 주민자치센터가 문을 열자마자 예상대로 불만이 터져 나왔다. 새벽부터 운동하러 오는 주민들 때문에 문을 열어줘야 하는 직원들은 고통을 호소했다. 2층에서 울려 퍼지는 북과 장구 소리, 노래 교실의 노랫가락은 기존 행정 문화에 익숙한 이들에게는 참기 힘든 ‘소음’이었다.


“동사무소를 모텔로 만드는 겁니까? 이게 무슨 행정입니까!” 어떤 간부는 내게 얼굴을 붉히며 소리쳤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이곳은 동사무소가 아니라 '주민자치센터'다. 공무원의 일터이기 전에 주민의 안방이어야 했다. 주민들이 즐거워하고 웃음소리가 커질수록, 자치(自治)의 싹이 틀 것이라 확신했다.


4. 기우가 만든 기적: 자율이 만드는 행복


피트니스 센터들의 반발이 심할 거라는 우려도 기우였다. 월 1만 원의 센터에서 운동에 재미를 붙인 주민들이 더 전문적인 시설을 찾아 일반 체육관으로 옮겨가면서 오히려 시장이 활성화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일반 체육시설 운영자들이 오히려 우리를 반기기 시작했다.


그런 고집과 노력들이 모여 이제 우리 시는 전국에서 벤치마킹을 오는 ‘주민자치의 성지’가 되었다. 전국대회 경연에서 우수상은 늘 우리 시의 독차지가 되었다. 그 소식을 들을 때마다 소리 없는 웃음으로 대신한다.


5. 에필로그: 세상은 변하고 행정도 변해야 한다


행정 주도의 행정에서 주민 주도의 행정으로 가기 위한 기본은 결국 '공간'과 '마음'을 내어주는 것이었다. 기존의 형태에 익숙한 이들은 변화를 두려워하지만, 그 두려움만큼 자치 기능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혁신은 모방이 아니라 '두려움'이다


이제 우리는 다시 행정복지센터로의 변화를 거듭하고 있다. 자치 기능이 살아난 지역은 복지도, 자원봉사도 스스로 해결해 나가는 자립의 시대를 맞이했다. 타율보다 자율적일 때 인간은 가장 능률적이고 행복하다. 그 평범하지만 위대한 진리가 지금 우리 시 주민자치센터 곳곳에서 울려 퍼지는 힘찬 북소리에 담겨 있다.


#주민자치 #공간혁신 #행정가 #지속가능한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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