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 초에 일본 미쓰비시자동차 엔지니어와 일을 할 때 놀랐던 것은 30~35년 이상 근무한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이었다. 그 당시 현대차에서 연구소에서는 15년 정도 경력이 최고이고, 차량시험 부분은 4~5년 차가 최고 경력자 인 곳도 있었다.
90년대 초에 현대차와 미쓰비시자동차의 그랜져 공동개발 회의가 열렸을 때 회의록에 "형인 미쓰비시가 아우인 현대와 공동개발 진행현황을 점검했다"라고 기록되었다. 미쓰비시 과장 한 명이 지적한 많은 사항들이 우리가 아무도 생각지 못한 것들이 많았었기 때문에 실력이나 역량이 뒤지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무척이나 자존심이 상했었다.
일본 미쓰비시 연구소를 방문하였을 때도 그 당시 우리나라에는 없던 실차풍동과 90년대 초였음에도 실차내구 주행시험을 무인자동차로 시험을 진행하고 있었던 것에 놀랐었다.
그때 보이는 것은 최대한 기억하여 메모하고 배우려고 노력하였었다. 실력이 힘이었다.
언젠가 현대차 협력사 엔지니어가 한 말이 기억난다.
나는 협력사에 입사한 지 10년 넘게 근무하면서 나름 전문가라고 생각했는데, 현대차의 입사 2년 차 엔지니어에게 기술설명을 들어야 할 입장이 된 것이 의아하다고..
사람이 능력문제가 아니라 “앞서가는 회사의 기술력이 회사문화 자체”이다 보니 2년 만에 10년 이상의 기술력을 넘어버리는 것 같았다.
그 당시 일본에서 배우려고도 노력했지만 반드시 일본을 이겨야겠다는 의지도 많이들 가지고 있었다.
젊은 현대차 엔지니어들이 미국자동차협회(SAE) 수백 편의 논문을 보면서 공부도 하였고, 회사에서 보내주는 유럽 기술유학도 각 부분에서 다녀왔다.
90년 초에 그랜져 개발프로젝트가 완료되었고, 약 5년 후에 후속 디자인 변경모델 (Face Lift)에 대한 2차 공동개발이 시작되었다. 5년의 세월이 지난 만큼 우리도 어느 정도 중견 엔지니어가 되었고, 그 당시 미국시장에서 승용차 판매는 현대차가 어느덧 미쓰비시자동차를 앞서기 시작했다.
5년이 지난 후 한국에서 다시 만나 회의를 하는 과정에서, 내가 담당했던 '바디 및 내구 시스템'에서는 동등한 위치에서 이야기할 수 있었고, 특히 '윈드노이즈' 측정분야는 현대자동차의 평가기술이 우수하여 오히려 가르쳐줘야 했다. 당연히 회의록은 동등하게 써졌다.
그날저녁 한국을 방문한 일본 미쓰비시자동차 엔지니어들과 회식이 있었는데, 같은 양을 술을 마셨는데 일본엔지니어들이 많이 취했고 그중 한 명이 피곤했었던지, 토하면서, 거의 정신을 잃은 상태가 되어서 현대차 엔지니어의 등에 업혀 호텔까지 데려다줘야 했다. 돌아오는 길에 우리끼리 술 한잔 더하면서 건배했다.
"일본에 기술도 이기고 술도 이겼다. 건배"
그러나 현대차는 자체적으로 개발한 새로운 그랜져 모델을 가지고 2000년 초에 일본을 진출했으나 택시로 소량판매 후에 실패하고 철수하게 되었다. 일본의 폐쇄적인 시장과 높은 품질요구, 현대차란 브랜드에 대한 신뢰성 미흡이 원인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러는 동안 현대차는 지속적으로 기술을 계속 발전시켜 2015년을 전후하여 개발차의 경쟁차량이 일본차가 아닌 독일차로 바뀌게 되었다. 현대차의 대외 품질지수가 일본차 동등이상으로 나오고 있어, 이제는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자동차기술과 디자인능력을 가진 독일차를 넘어보고자 했다.
BMW 부사장이었던 알버트비어만을 고성능센터장으로 모셔오고, 디자인센터의 중역들을 독일차 회사에 근무한 경력을 가진 분들로 보강되었다. 이러한 노력의 결실이 '제네시스' 브랜드 출시와 성공으로 이어졌다.
2020년대 들어와서는 그 결실이 전기자동차부터 나오기 시작하였다.
22년부터 일본에 수출을 시작하였던 현대차 아이오닉 5가 22년 말에 '일본의 올해의 차 (Car of The Year)'로 선정되는 쾌거를 이루었다.
매우 폐쇄적이고 '외산차량의 무덤'이라 불리는 일본자동차 시장에서, 1차 30대, 2차 10대를 선발한 후 자동 평론가, 언론인, 일반지식인등 60명이 실제 차량을 시승하면서 평가하는 까다로운 '올해의 차' 선발과정에서 객관적으로 평가를 받은 현대차의 기술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