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내가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땐 수백만 명이 손잡고 동시에 올라도 될 정도의 너비를 가진 계단이 놓여 있었다. 그 계단을 끝은 검은 점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끝이 있긴 한 걸까. 주변엔 계단 외엔 아무것도 놓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각자 다른 높이에서 끊임없이 오르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계단을 타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것처럼 쌩쌩하게 걷고 있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지쳤는지 계단에 걸터앉아 쉬고 있기도 했다. 그렇지만 여기는 내가 살던 세상과 다른 차원이었다. 그 누구도 목말라 보이지 않았으며 물을 달라고 하는 사람이 없었다.
대략적인 분위기 파악한 나는 다른 선택지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이렇게 끝없이 올라가다 보면 나는 이 차원으로 넘어온 이유를 알 수 있을까? 이곳이 사후세계인가. 연옥인가. 천국과 지옥의 중간단계인가. 아무래도 호기심으로 가득 찬 마음은 차원을 넘어서도 데려왔나 보다. 그저 오르기만 하면 되는 계단 하나 가지고도 궁금한 것이 너무 많았다. 공상이라고 불리는 이 상상은 계단을 오르기만 해야 하는 끝없는 여정에 도움이 많이 될 것 같았다.
그렇게 한참을 올라서 뒤돌아 보니 어느 정도 고도에 올랐지만 여기 옆에서 걷고 있는 그 누구도 몸에 시계 같은 것을 차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대체 얼마큼의 시간을 할애한 것인지 어느 정도의 단계를 밟아온 건지 알 수 없었다. 근데 굳이 다른 사람에게 말을 걸정도로 심심하지 않은 거보니 아직 데드 포인트에 온 것 같지는 않았다. 가만히 자리에 서 옆을 보니 영어를 쓰는 사람들이 중국어를 쓰는 사람과 대화를 하고 있었다. ‘둘이 통역 없이 대화를 하는 거보니 확실히 여기는 내가 살던 세상은 아니구나. 나는 죽은 건가? 흩어져서 원자의 세계로 들어온 것인가? 매트릭스의 행렬 안 아니야?’ 나의 지적 갈증에 대한 해결책을 내 줄 사람은 없어 보여서 공상을 계속 이어나가기로 했다.
‘아니 나는 그때 이후로 나름 내가 살던 세계가 내가 알던 차원이 아닐 수 있단 의심을 했잖아. 그래서 그곳에서 천국을 이루기로 결심했단 말이지. 좋은 일이 생기건 나쁜 일이 생기건 나만의 천국을 만들어 가기로 말이야. 그땐 세상의 진리를 다 깨우친 것만 같았는데 말이지. 여긴 대체 어디야. 깨달음에 이르면 굳이 새로운 차원에 올 필요가 없는 거 아니냐고? 나름 즐거운 일, 슬픈 일 다 겪어내면서 재밌게 살았는데 말이야. 여긴 어디냐고!!’ 공상은 지루함을 이기게 해 줬지만 지금의 계단을 빠르게 올라갈 수 있는 해결책을 주진 못했다.
“어이, 조심하시오. 당신의 생각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 있으니...”
누군가 갑자기 말을 걸어왔다. 나의 생각이 읽힌다고? 나는 이 말을 한 사람을 쳐다보기 위해 시선을 돌리려던 순간 갑자기 계단이 휘어지면서 출렁이기 시작했다. 계단 밖은 바닥을 알 수 없는 심연의 우주공간이었다. 그리고 어디선가 현의 단조의 음악이 들려왔다. 마치 음악 같기도 진동 같기도 한 소리가 이어지는 동안 계단은 여러 모양의 곡선의 형태로 휘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재빠르게 계단 주변 설치물을 붙잡으려 했지만 보이지 않았고 계단 끝에 간신히 매달렸다. 몇 초의 시간을 매달려 있었던 걸까. 팔힘은 점점 빠지기 시작했고 저 밑 심연으로 빠지게 되면 다시 죽는 것이 아닌가 두려움이 일었다.
그렇게 이제 손끝만 계단 끝에 매달렸을 때 누군가 손을 뻗어 나의 손목을 잡고 나를 건져 올리기 시작하였다. 그는 어딘가에 고정되어 있어 미끄러지지 않는 듯하였고 그가 나를 계단 평면의 안전한 곳으로 이끌었을 때 계단은 곡선의 형태에서 벗어나 원래의 상태로 돌아왔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살았어요.” 내가 말했다.
“별 말을요. 해야 할 일을 했을 뿐. 당신은 여기가 어디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가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아까 나에게 조심하라고 말한 목소리의 톤과 정확히 일치하는 듯 보였다.
“사후 세계 그런 차원 아닐까요? 아니면 매트릭스의 행렬 안이거나 일단 이 끝없는 계단 끝을 올라가 보면 알지 않을까요?” 내가 대답했다.
“만약 이곳이 사후세계고 저기 계단 끝에 당신을 위한 심판대가 있다 한다면 당신은 여기 오기 전의 생을 온전히 살았다고 말씀할 수 있습니까?” 그는 계속 진지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저 심판대에서 제가 심판을 받아서 지옥판정을 받으면 저는 지옥에 떨어지는 것입니까?” 나는 그가 무엇을 알고 있는가 궁금했다.
“글쎄요. 그건 저도 모릅니다만, 그저 물어보는 거요. 둘 다 계단을 올라야 하는데 공상도 같이하다 보면 재밌지 않겠소?” 그는 그제야 웃어 보였다.
“온전히 살았다라… 그것이 이전 차원에서의 삶에서 획을 하나 그은 것처럼 대단한 삶을 살았다거나 도덕적으로 완전무결한 삶을 살았냐고 물어보는 거라면 당연히 제 대답은 [아니요]입니다. 무결을 추구했지만 무결을 점이라고 생각하고 세밀하게 초점을 맞추려 하다 보니 소진되는 내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목표는 흔들리지 않되, 할 수 있는 영역을 인식하다 왔습니다. 그 과정에서 어떤 결과의 끝을 보고 왔는지, 아니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그저 그 과정에서 애를 많이 썼던 기억만 남은 것 같군요.”
나는 내 입에서 술술 나오는 문장들이 스스로도 신기했다. 마치 정답을 아는 듯한 확신에 차 있는 나 자신은 생소했다.
우리는 다시 계단을 걸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내게 다시 말을 걸어오기 시작했다.
“매트릭스의 행렬이라니 그대는 과학을 신봉하는 자였소?”
“아니요. 저는 과학을 신봉하지도 알고 잘 알지도 못했습니다. 오히려 삶의 경험을 통해 신을 믿는 자에 가깝습니다. 그러나 과학을 신봉하는 이들을 친구로 두었지요. 그들은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를 매트릭스의 행렬이라 생각하더군요. 아니면 거대한 컴퓨터 속 일 수도 있다고 믿기도 했지요.” 나도 그를 따라 계단을 오르는 속도를 맞추며 말했다.
“그런데 그들의 말에 그들의 삶의 고통이 보였습니다. 본인을 제외한 상대를 AI나 휴머노이드로 보는 이도 있더군요. 그러나 결국 상대를 인간인지 로봇인지 구별할 수 없을 때 우리가 의심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입니다. 바로 자기 자신뿐입니다. 내가 휴머노이드일 수도 있다는 생각 말이에요. 저는 그들이 던진 질문을 더 파고 들어갔습니다. 우리가 설령 신이 만든 피조물이나 장난감에 불과하거나 거대 컴퓨터 속 휴머노이드여도 결국 생은 자신답게 사는 방법뿐입니다. “
말을 하다 보니 그보다 내가 더 진지한 상태가 되어버렸다는 것을 느꼈다.
그는 갑자기 너털거리는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참, 흥미롭게 살았겠군요. 당신의 인생 말입니다. 당신은 신의 존재를 믿는 것 같은 느낌입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은 소감을 전해볼까 합니다. 어차피 신은 당신의 인생에 침묵하기도 당신이 인식할 수 있는 것을 통해 당신에게 말을 했을 거라 생각하오. 아마 그래서 당신은 자신만의 계명을 만들어온 것 같습니다. 결국 당신은 언젠가 진짜 신을 만날 것 같단 생각이 듭니다. 기쁘나 슬프나 힘드나 가벼우나 당신의 삶도 이미 천국이었을지도 모를 일이겠습니다.”
나보다 몇 계단을 앞서 걷던 그가 더 이상 걷지 않았고 나는 그를 따라 남아있는 계단을 걸어 올라갔다. 그리고 우리 앞엔 더 이상 오를 수 있는 계단이 남아있지 않았다.
[빛이 있으라 하매 빛이 있었고 빛이 신이 보기에 좋았더라]
그 순간 우리가 밟고 있던 계단이 사라졌고 우리는 서로를 응시한 채 우주의 원자가 되어 팽창해 나갔다. 점점 작아지는 나의 물리적 형태를 보고 빛을 내뿜는 그를 보면서 생각했다.
‘계단을 같이 걷던 당신은 신이었나.’
그렇게 나는 단위로 셀 수 없는 쿼크가 되어서 시공간 속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