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끊임없이 몰려드는 업무 파도에 이리저리 흔들리다 시계가 11시 30분을 가리킬 때 은주는 핸드폰과 지갑만을 챙겨서 사무실을 급하게 빠져나왔다. 그리고 바로 케이스를 열어 무선이어폰을 끼며 잔잔한 음률이 은주의 마음을 가라앉혀주길 바라며 노래를 틀었다.
은주는 회사 근처 김밥천국에서 밥을 먹는 것을 선호한다. 혼자 있어도 이질감이 들지 않는 곳이며 빠른 식사가 가능한 곳. 은주는 밥이 나올 때까지 밀릴 스팸문자를 정리하기로 했다. 주식 초대방, 해외서 카드를 썼으니 결제해 달라는 URL, 새로운 강의가 오픈되었다는 문자들을 하나씩 쳐내 가던 은주의 시선을 한 통의 문자가 있었다.
[부고 알림]
故김경주 님께서 별세하였기에 아래와 같이 전해드립니다.
일시 2023년 5월 27일 18시
빈소 서대문 하늘공원장례식장
발인 2023년 5월 30일 오전 10시
은주는 스팸문자가 잘못 전송된 줄 알고 삭제버튼을 누르려던 찰나 번호 위에 저장된 인쇄소라는 이름을 확인하고는 삭제버튼을 누르지 못하였다. 그리고 이미 발인 날은 2주나 흘러가 있었다.
“저 제작 상담하려고 하는데요… 문이 잠겨있어서 연락드려요.”
“아, 그래요? 주변에 있으니 좀만 기다리세요~금방 갑니다.”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가 안정적이었다.
‘응? 끝인가?’ 은주는 마음속에 묘한 이질감이 들었다. 은주는 신년을 맞아 자신의 버킷리스트인 에세이집 출간을 위해 인쇄소를 알아보고 다니고 있었다. 책을 만들기 위한 방법 중 외부의 변수에 흔들리지 않고 책이 나올 수 있는 방법인 독립출판을 선택한 것이었다.
일련의 과정을 거쳐 실물 구현만 남은 상황이었다. 10분 정도 기다리자 딱 봐도 연배가 60대 아님 70대로 보이는 사람이 등장했고 은주는 저 사람이구나 생각했다. 그 사람은 은주를 대충 인사 같은 것을 한 다음 2층에 위치한 자신의 사무실 문을 열었다.
은주는 방안에 들어서면서 여기가 상담실이나 사무소라기 보단 골방 연구실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 앉아요.” 그 사람이 말했다.
[북시니 서울지사 김경주 본부장]
그리고 커피를 타주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 사장은 대뜸 명함을 건네면서 자신의 업력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은주는 첫마디를 듣자마자 자신도 모르게 판단의 계산기가 빠르게 돌아갔다.
‘내가 여기서 계속 들어야 되는가? 지금이라도 뛰쳐나갈까?’ 은주는 업체들과의 전화연락에 지쳐 인터넷으로 간편하게 요청사항을 넣을 수 있는 업체를 찾아온 것이었는데 해당 인쇄업체는 본사에 위치해 있었고 은주가 찾아온 곳은 서울지사였다.
‘여기서 상담을 받고 온라인 신청을 하려 했는데 지사의 사장처럼 보이는 사람의 나이에서 내가 원하는 세련됨이 나올 수 있을까? 이 골방 벽면의 가로본능으로 눕혀져 있는 저 백과사전처럼 제작이 되지 않을까?’ 은주는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사장은 말하는 걸 들어보니 서울지사는 본사와 따로 영업과 제작은 한다고 했을 때 은주의 탈주 고민은 깊어졌다. 김경주 본부장의 이야기는 점점 길어졌다.
“내가 인쇄에 뼈가 굵은 사람이에요. 근데 좋았다 나빴다 했지. 근데 그 파주의 젊은 사장이 나한테 일을 같이 하자고 하더니 나한테 서울지사를 맡아서 해보라 하더이다. 내가 여기 을지로에 역진출을 한 거지. 우린 파주에서 본진으로 도전장을 내민 겁니다. 진출한 지 몇 년 되지 않지만 저희가 이쪽 물량의 대다수를 소화합니다. 디지털이고 옵셋이고 다 가능한 게 여기에요. 해상도나 조밀도에서 디지털인쇄가 더 고급지지만 우린 다 디지털로 옵셋물량을 소화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기계 세팅을 그렇게 해놨어요. 3년만 더 키우고 제 다른 인생을 살아볼까 합니다. 내가 파주 사장하고 한 약속이에요.”
그러나 은주는 살면서 처음 보는 눈빛을 마주하여 골방을 나가지 못했다. 자신의 일에 대한 명확한 확신이 담겨있는 그 눈빛. 표현하자면 사람의 뒤에서 호랑이가 보이는 느낌이었다.
이야기의 끝에 그가 보여준 것은 그녀가 처음 소셜 글쓰기 모임에 나간 업체가 제작한 다이어리였다. 그 소셜 업체는 인스타 광고와 함께 한 때 대한민국의 MZ라면 한 번쯤은 봤거나 해본 업체였다. 소셜모임의 열풍과 함께 모임에 참여하는 젊은 이들이 많았고 그 다이어리만을 원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핫했다. 그렇게 은주는 영업을 당했다.
한 시간가량의 업력소개가 끝나고 그가 자신 앞에 놓인 노랑 메모패드에 규격과 사이즈, 원하는 점을 적으라고 했다. 그리고 미리 만들어놓은 가제본 한 권을 두고 가라고 했다.
그러고 은주는 자신이 주어야 할 외주가 끝났으니 본업으로 돌아가 완성된 책을 받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본업으로 돌아가 은주는 자신의 일을 소화하고 있었다. 그러나 은주는 지속적인 문자를 받기 시작했다.
“김경주 본부장입니다. 연락 주세요.” 은주가 문자를 늦게 보니 부재중 전화가 찍혀있었다.
“네~여보세요.” 바쁜 본업에 지친 은주가 한껏 낮은 톤으로 전화를 받았다.
“나 김경주 본부장입니다. 그 인쇄 파일이 깨져있어요. 그 도련선 끝까지 색을 채워야 합니다. 그래야 책 표지에 색을 다 입힐 수 있어요. 지금은 책규격에 맞춰서 색을 입혔더라고. 이러면 책 표지가 원하는 대로 안 나오고 흰색이 들어가 버려. 그것 좀 해서 보내봐요.”
“저 지금 일하는 중인데… 책 파일이 들어있는 노트북이 집에 있어서요.”
“책 제작 다음 주 수요일까지 받아야 된다고 하지 않았어요? 맞춰서 해주려면 우리도 어쩔 수가 없어. 늦어도 내일 오전까지 완벽한 완성본이 우리 손에 받아야 해. 파일 받고 우리도 봐야지.” 은주는 그의 논리에 반박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점심 1시간 동안 편도 20분 거리의 집에 있는 노트북으로 작업을 해서 보내야 하는 미션임파서블을 수행하기로 했다. 그녀는 달리는 택시 안에서 수정작업을 하기 시작했는데 다뤄 본 지 얼마 되지 않은 편집프로그램이 익숙지 않아 고전을 계속하였다.
‘유튜브에서 이렇게 하면 된댔는데, 뭐가 도련선 이상으로 밀어야 된다는 거야.’
일이 원하는 대로 풀리지 않자 짜증이 은주의 마음에서 치밀었다.
‘내가 왜 이걸.. 한다고…’ 생각을 하자마자 편집프로그램 내 설정한 일정 선 이상으로 색이 채워졌고 은주는 드디어 자신이 도련선까지 색을 채웠다고 생각을 하며 인쇄소에 메일을 다시 보냈다. 다 보내고 나니 밥도 못 먹은 은주의 점심시간은 끝나 있었다.
은주가 쌓여있는 본업을 하나씩 쳐내고 나자 시간은 오후 두 시를 가리키고 있었고 마음 한편이 불안하던 은주는 핸드폰을 열어보았다.
[본부장입니다. 연락 주세요.]
“하…” 은주는 자신도 모르게 노이로제가 올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본부장님, 제가 지금 본업 중이라 연락이 어렵습니다. 말씀주실 사항 메시지로 답변 부탁드립니다.]
은주가 전화를 하지 않고 메시지로 이유는 자신은 최선을 다했는데 미비사안이 생겼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은 것도 있었다.
[은주 씨가 해서 보낸 것은 도련선이 아니라 인쇄선입니다. 지금 우리 디자이너가 작업 중인데 내가 직접 가서 물어보니 이러면 문제가 여전하답니다. 내가 우리 디자이너한테 직접 수정 부탁할 테니 파일 다 보내주세요.]
김경주 본부장이 답장이 왔다.
은주는 순간 미안한 감정이 물 밀듯이 밀려왔으나 본업을 다시 시작해야 했다. 그리고 무언가의 알량한 자존심이 일랑이는 것을 느끼면서 문자를 보냈다.
[네. 감사합니다. 네 시까지 보내드릴게요. 업무 중이라서]
그렇게 북시티의 디자이너의 고퀄리티의 수정작업을 거친 후 나오게 된다는 사실이 안도가 되었다. 이제 책을 기다릴 일만 남았다 생각하던 은주에게 또 한 번의 연락이 왔다.
[본부장입니다. 연락 주세요.]
은주는 체념을 살짝 담아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저번 일의 과오를 생각하며 밝은 톤으로 전화를 걸었다.
“본부장님~한은주입니다. 무슨 일 때문에 그러세요?”
“내가 은주 씨 책을 보니까 간지를 넣는 게 예쁠 것 같아 이게 500부 다 넣으면 5만 원에서 10만 원 돈 들어가요. 표지가 보라색이니까 분홍색 간지를 넣으면 딱 예쁘게 나올 것 같아요. 믿어봐. 은주 씨 선택이지만 하면 내가 마진 안 남기고 1만 원만 받을게.”
은주는 왠지 모를 미안함이 올라왔다. 그러고는 마지못한 척 간지를 넣겠다고 그게 좋을 것 같다고 했다. 그리고 은주는 시장조사를 했기 때문에 김경주 본부장이 1만 원만 받겠다고 한 것은 정말 선물이나 보너스 같은 느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책은 다음 주 월요일 날 나올 건데 올 수 있죠? 우린 5시에 문 닫으니까 그전에 찾으러 와요. 그리고 내일 내가 일 있어서 남아있는데 책 자르기 전에 보러 와요.”
“저 사장님... 아니 본부장님. 제가 일이 늦게 끝나서 책을 찾으러 갈 순 없는데 혹시 택배로 보내주면 안 될까요? 그리고 전에 계좌 한도가 걸려있어서 못한 잔금 결제도 그날 같이 보내드릴게요.”
은주는 조심스럽게 김경주 본부장에게 말했다.
“아니, 택배는 절대 안 돼. 일단 택배기사들이 박스를 던져요. 그럼 책이 상해. 은주 씨가 온다면 우리가 용달을 알아봐 줄 순 있어. 근데 본인 책이잖아. 내 말 뜻 알죠?”
은주는 500부나 찍었으니 10프로 정도의 감모손실을 감안한다면 택배로 받아도 되지 않을까 생각했던 자신, 그리고 자신의 책에 대한 마음가짐이 인쇄소 사장보다 적었다는 사실이 부끄러웠다.
그렇게 은주는 자신이 점심시간을 활용해서 어떻게든 찾아가겠다고 말한 후 다음날 늦은 감리 아닌 감리를 하러 인쇄소에 들렸다. 김경주 본부장은 은주를 마치 인쇄소 견학을 온 수습생처럼 구석구석 보여주었다. 그리고 인쇄소 직원들에게 책 보여주러 왔다고 은주를 소개하기에 이르렀다. 500부는 인쇄소 마진이 크지 않은데 마치 대단한 물량을 맡긴 고객을 소개하듯 했다.
책은 아직 도련선 부분이 도려 지지 않은 채로 500부가 쌓여있었는데 웅장함과 함께 자신이 계획한 일을 이뤄냈다는 벅차오름이 있었다.
“이거 간지 넣은 거 한번 보라고. 아주 예쁘지? 자, 내가 자르는 거 보여줄게. 김 이사 이거 한 30부만 잘라보자고.”
은주는 연분홍 간지가 들어간 책이 너무 마음에 든다는 말은 차마 못하고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김경주 본부장이 익숙하게 영업이 끝나 잠들어있는 기계를 켜자 드르렁 거리는 기지개소리와 함께 기계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김경주 본부장은 왜 이렇게까지 해주시는 걸까? 내 가제본 속에 내용은 읽어보시고 마음이 동하신 걸까?’ 은주는 답을 듣고 싶진 않지만 추측까지만 해보고 싶었다. 그냥 그랬다. 은주는 잔금을 결제하였고 다음 주 월요일 점심시간 차를 빌려 인쇄소로 향했다. 햇볕이 환하게 인쇄소 도로변을 비추던 때 은주는 책을 다 실어 옮긴 후 본부장께 말했다.
“날도 좋고 본부장님이 나와서 직접 배웅해 주니까 마치 이삿날 같아요.”
“이삿날 맞네. 책들이 이사 가는 날. 애들이 좋은 곳으로 갔으면 좋겠어. 잘 가요.” 김경주 본부장이 웃으면서 말했다.
“다음 책도 본부장님께 만들러 올게요. 너무 감사해요. 잘 지내다 뵈어요.” 은주도 미소에 화답하듯 웃으면서 차에 탔다.
그리고 만으로 2년이 오늘. 은주는 아직 1년이 남았다 생각했었다. 그리고 내년에는 정말 갈 생각이었다. 그러나 더 이상 김경주 본부장님은 없다.
2주 전에만 확인을 했어도… 메시지 알림을 꺼놓지만 않았어도… 아니 메시지 정리를 조금만 일찍 했더라면…
그녀는 마음속에서 진짜 어른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구별하기도 하는데 김경주 어르신 가는 길을 배웅하지 못했다. 그래도 조용히 가서 인사라도 하고 올 순간은 이제 없다. 김경주 어르신이 만들어 준 책은 베스트셀러가 되진 못했어도 그녀와 어딘가에 있는 독자들을 연결시켜 주었고 그녀가 살고 싶은 삶을 그리게 했고, 그날까지 본업을 임하는 태도를 배우게 해 줬다.
그런 어르신에게 은주는 인사를 못했다.
“본부장님. 더 깊이 감사드려요. 덕분에 많이 배웠고 어떤 곳에 이르렀고 가끔 생각나면 넘어진 자리에서 일어났다고.”
희한하게 은주는 여전히 어려운 시기를 겪어내고 있으면서, 좋은 어르신을 만났다.
‘나 자신조차 버티기 어렵다고 생각할 때, 어르신들은 나에게서 무엇을 보았길래. 작은 호의들을 모아 나를 지켜주는가? 내 삶의 기꺼이 키다리 아저씨 같은 존재들이 되어주는가?’라고 은주는 생각했다.
“그러한 순간들을 만나면 할 수 있을 때 감사를 나누자고. 마지막은 없을 수도 있잖아.”
김경주 본부장님은 가는 순간에도 은주에게 가르침을 주고 가셨다. 은주는 김밥천국을 나와서도 종종 김경주 본부장님을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