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워너비미 Feb 28. 2023

개화_뿌리내린 신념의 여자들

소설연재_정희와 관순 그리고

정희는 기도를 마치고 집으로 향했다. 그런 정희를 먼발치에서 지켜보는 이가 있었는데 홍진이었다. 홍진은 낮에 정희랑 만나기로 한 시각에 정확히 도착했지만 그곳에 들어가지 않았다.


그저 정희가 홍진이를 언급하며 기다리는 모습을 피식거리며 지켜봤고 정희가 문 밖을 나서는 사람들에게 인사할 때 숙인 고개에서 바뀌는 표정을 알아챈 이도 홍진이 유일했다.


그렇기에 홍진은 정희가 다시 천막으로 돌아올 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정희가 천막에 들어가 한참을 있다가 나올 때 홍진은 궁금하기보단 앞으로 닥칠 미래에 관한 불안이 엄습했다.


다음날 정희는 연희학교에 등교하여 동아리에 가입했다. 정희가 가입한 동아리는 외관상으론 종교 대학 연합 동아리였다. 하지만 그들은 힘써 모여 시국을 분석하였고 나아가야 할 바를 고민하는 모습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들의 기도를 들여다보면 신보다 조선의 독립이 우위에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정희와 관순이 만난 것도 이때였다. 동아리 모임에선 사회나 종교적으로 깨어있는 사람의 강론을 들은 후 대여섯 명씩 모여서 자신들의 소신을 풀어내는데 서로의 생각을 듣고 나서 정희와 관순은 서로를 알아보았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연희학교의 신정희와 이화학당의 유관순은 앞으로 휘몰아칠 본인들의 운명을 모르는 듯 평범한 이야기를 나눴다. 그렇게 종로 거리를 걷다가 흐르는 천에 앉아 가족사를 털어놓기도 하고, 좋아하던 남학우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모습은 제때 꽃 핀 소녀들 같았다.


1919년 1월 12일. 대한제국의 내시가 궁궐 처마에 올라가 왕의 도포를 휘날리며 곡을 했다. 망곡은 고종의 상여가 지나가는 서울 도심에서 깊고 낮은 톤으로 울려 퍼졌다. 고종의 마지막 백성들은 자진하여 상복을 입었다.


조선의 왕후가 그랬듯, 고종의 죽음에 일본이 관련되었단 풍문은 아무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지만 들어보지 않은 자가 없을 지경이었다.


관순은 2월 28일 동아리 연합 모임에서 정희에게 편지를 은밀히 내밀었다.  


-우리 이문회는 3월 1일 파고다 공원으로 가기로 했다. 연희학교의 학생들도 시대의 부름에 응답하길 바란다. 그게 여의치 않으면 정희 너라도 우리와 함께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정희는 조용히 편지를 펼쳐보았고, 이내 가슴이 주체할 수 없이 빠르게 뛰기 시작하였다. 무언가의 용솟음 같기도 하고, 걷잡을 수 없는 불안인 것 같기도 하였지만 정희는 고민하지 않았다.


그날 정희는 집으로 돌아와 저녁준비를 한 채 어머니를 기다리고 있었다. 남의 집 일을 마친 옥주가 지친 기색으로 들어오자 정희는 웃으면서 어머니를 맞이했다.


그리곤 어머니가 좋아하는 자신의 학교생활에 대하여 늘어놓았다. 학교에서는 조선의 지엄한 법도와는 다른 것을 배운다며 격식 없이 영어로 자신의 꿈을 나열해 보았다.


이젠 여자들도 조혼이나 정략결혼이 아닌 자유연애를 해도 되는 시대가 올 것이며 신 여성은 독립적으로 자신의 길을 개척하는 사람이라며 자신은 대한 제국의 신여성으로 살 것이라며 뽐을 내었다.


과연 그런 세상이 올까 하는 말을 내뱉는 정희를 보며 옥주는 고단함은 잊어버린 듯 커다란 웃음을 참지 못하였다. 그렇게 웃음이 끊이지 않던 밤이 깊어져 옥주는 잠이 들었다. 정희는 그런 옥주의 손위에 손을 포개고 기도했다.


“이내부터 영원까지 지켜주소서.”


기도를 마친 뒤 정희는 옥주의 머리를 연신 쓰다듬었다. 그리고 정희는 내일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때 문밖에서 누군가 연신 정희를 나지막하게 계속 불렀다. 어딘가 낯익은 목소리에 정희가 나가보았 때 그곳엔 홍진이 서있었다.


“이 시각에 무슨 일이야.”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투로 정희가 말했다.


“가지 마라, 정희야."


홍진은 한 번도 잡아보지 못했던 정희의 손을 덥석 잡으면서 말했다. 정희는 갑작스러운 홍진의 제스처에 놀랐지만 이미 모든 걸 아는 듯한 홍진의 모습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가지 마라. 정희야. 제발. 네 아버지 일로 너와 너희 어머니 얼마나 힘들었는지 누구보다 잘 안다. 내일 가지 말고 학교를 마치면... 네가 하고 싶은 공부 다 마치면 나랑 결혼해서 그렇게 아기 낳고 편안히 살자. 그렇게 홀로 세상에 맞서지 말고 내가 튼튼한 돌벽이 될 테니 너랑 네 어머니 챙기며 살면 안 되나. 정희야."


다른 한 손마저 정희의 손을 감싸 쥔 홍진의 모습은 누구보다 절박해 보였다.


“너 언제 알았니.”


정희는 무심한 듯 담담하게 물었다.


“네가 낮에 사람들한테 인사할 때, 천막에 들어갈 때 그리고 너를 마음에 담은 순간부터”


홍진은 솔직하게 말하면 정희의 마음을 돌릴까 싶었다.


“홍진아, 세 달 전 들은 강론 기억나? 늑대와 양 말이야. 늑대들이 가득한 세상에서 늑대에게 물어 뜯겨도 끝까지 양으로 살아남으라는 강론. 내가 그때의 이해가 안 돼서 곰곰이 생각해 봤거든. 근데 오늘에서야 이해가 가는 것 같아.


늑대가 물어뜯는다고 양이 늑대가 되면 세상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아. 양이 거친 늑대들 사이에서 필사적으로 도망치는 것 같아도 양인 모습 그대로 살아남아야 그것이 양의 존재성이고 완성될 수 있는 이야기인 거야.


무슨 말이냐면 조선이 양이고 우리가 내일 할 일이 양으로써 늑대에게 당당히 맞서는 일이야. 돌아올게. 아버지처럼 죽지 않을게. 그때 다시 얘기하자.”


말을 마친 정희가 홍진의 양손 사이에서 손을 뺀 후 집으로 들어갔다.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경 정희는 파고다공원으로 향했다. 그곳은 민족대표 33인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기로 예정된 장소이자 관순과 만나기로 한 장소였다. 정희가 파고다 공원에 도착했을 때 이미 많은 학교의 학생들이 모여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관순을 찾는 것은 무리처럼 느껴졌다. 정희는 관순도 이곳에 있으리라고 믿으며 기다렸다.


그러나 민족대표 33인은 일본의 탄압을 피해 파고다공원이 아닌 태화관에서 모였다. 이를 알 수 없던 학생들은 잠시 당황했지만 정재용이 팔각정에 올라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첫째, 우리는 이에 조선이 독립국임과 조선인이 자주민임을 선언한다. 이 선언은 세계 온 나라에 알리어 인류 평등의 크고 바른 도리를 분명히 하며 이것을 우리 후손들에게 깨우쳐 우리 민족이 자기 힘으로 살아가는 정당한 권리를 길이 지녀 누리게 하려는 것이다.”


정재용이 흔들림 없이 독립선언문을 끝까지 읽자 모인 학생 무리에서 만세 소리가 터져 나왔다. 정희도 울컥하는 마음을 누른 채로 저고리 안에 손을 넣어 준비해 온 태극기를 꺼내 들었다.


“만세, 대한 독립 만세.”

“조선 독립 만세”

“독립정부를 수립하라”


정희는 구호를 함께 외치며 연신 태극기를 흔들었다. 누군가는 모자를 날리며 누군가는 선언서를 날리며 그들은 한 걸음씩 행진했다. 어떤 무리는 보신각을 지나 남대문으로 향했고 정희는 매일신보사를 지나 대한문으로 향하는 무리를 따랐다. 무리는 선언문을 사람들에게 나눠 주기도 궁을 향해 절을 하기도 하며 태평로를 지나 미국 영사관을 향하고 있었다.


탕-타당-


어디선가 총포의 소리가 들리고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행진하는 무리의 끝에 일본 헌병들이 총구를 시위대를 향해 겨누고 있었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발포가 시작되었다. 시위대를 구경하던 사람들은 행여 다칠까 황급히 자리를 피했다. 그렇게 무리의 뒤부터 학생들이 쓰러지기 시작했다.


정희는 연사 되는 총소리에 덜컥 겁이 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순간 어머니 옥주부터 홍진, 언더우드, 아버지 재수까지 자신이 아끼던 사람들의 모습이 스쳐갔다. 그렇게 정희의 마음은 흔들리고 있었다.


그때 무리에서 누군가 소리쳤다.


“행진해야 하오. 팔짱을 끼고 갑시다. 대한 독립 만세!”


또렷한 음성이 들리자 정희는 생각할 틈 없이 옆에 있는 여학생들과 팔짱을 꼈다. 그들의 얼굴을 보니 정희의 옆으로 이화학당 신특실과 노예달이 있었다.


'관순이도 왔겠구나'


정희는 이화학당 선배인 특실과 예달을 보면서 관순도 필시 이곳에 왔을 거라 생각하고 뒤돌아 보지 않고 앞을 향해 걸었다. 일본 헌병들은 점점 전진하여 총을 쏘았고 그 후엔 총에 달린 검으로 쓰러진 사람들을 처리를 하였다. 그리고 총소리는 점점 정희에게 가까워져 왔다.


탕—타당---


정희는 휘청였다. 특실과 예달은 휘청이는 정희를 바로잡으려 했지만, 정희는 한걸음도 더 내딛지 못했다. 그럼에도 정희를 옮기려 노력했지만 빠르게 다가온 젊은 일본 헌병 하나가 재빠르게 총검으로 정희의 가슴 부분을 저며버렸다.


그 모습을 찍는 파란 눈의 외국인은 그녀를 향해 카메라를 들고 셔터를 눌렀다. 스코필드였다. 파인더를 보고 있지 않은 질끈 감은 왼쪽 눈에선 고온의 눈물이 흘렀다.


스코필드는 그녀가 진고개에서 밧줄에 목이 감긴 채 죽은 남자의 딸임을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그날 아빠의 목에 둘린 밧줄을 완전히 끌어내고 순백의 천을 둘러주었다.


스코필드는 그날의 장면을 찍진 못했지만 오늘의 이 사진이 그 내용을 전해주기를... 이들의 소망을 이뤄주길 연신 마음속으로 빌었다.


정희의 시야가 순식간에 까맣게 변했다가 흐릿하게 다시 보였다.


'아버지처럼 가면 안 되는데… 어머니. 용서하소서. 그리고 이내부터… 영.. 원.. 까지...'


정희가 마음속 소원을 다 빌기도 전에 정희는 더 이상 땅에 국한된 사람이 아니게 되었다. 무리는 어쩔 수 없이 정희를 두고 떠나갔다. 그렇게 낮에 있던 거대한 열기를 잊은 듯한 밤은 찾아왔다.


침묵해 버린 서울 한복판 정희의 시신 앞에 한 사람이 다가섰다. 마치 저녁 내내 어딘가를 뛰어다닌 듯 젖은 옷을 입은 홍진이었다.


홍진은 정희를 보았을 때 아무 말을 할 수 없었고 이내 몸을 구부려 그녀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미처 감지 못한 정희의 눈을 감겨 주고 정희의 머리를 끌어안은 채로 숨죽여 낮게 한참을 울었다.


그 모습을 상복을 입은 5명의 여자가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의 이름은 유관순, 서명학, 김복순, 김희자, 국현숙이었다.


3월 5일, 다섯 명의 여학생은 시위대 선봉에 섰다. 그리고 붙잡혔으며 곧 풀려났다. 그날 이후 학교는 조선총독부의 지시를 따라 휴교를 선언하였다.


계속 학교를 다닐 수 있는지는 관순에게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3월 1일의 밤 광경을 잊을 수 없게 된 관순은 망설임 없이 짐을 싸 고향으로 향했다. 그리고 4월의 아우내만 바라보며 한 달을 치열하게 살았다.


년의 일이었다.

작가의 이전글 개화_밧줄에 목이 묶인 남자, 재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