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족 성폭행, 묻지마 살인의 뉴스를 보면서
인간 세상에 갈등이 왜 일어나는지 생각을 해보면 그 원인은 오로지 나만 생각하는 이기심에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진정한 나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해보지 않는다. 분석심리학자 칼 융은 사람에겐 의식의 부분과 무의식의 부분이 있다고 설명했다.
사람은 보통 자신의 무의식에 무엇이 있는지 궁금해하지도 알려고 하지 않는다. 나도 그랬다. 내가 못 견디게 힘들어지기 전까지는 말이다. 삶이 되게 재미난 부분이 어떤 큰 깨달음을 얻으면 소설이나 드라마처럼 해피엔딩으로 끝이 나면 좋은데 실상은 그렇지 않다. 자신의 무의식을 발견해 이전보다 인지영역이 확장되어 깨달음을 얻는 사람들이 있다.
아무리 큰 깨달음이 오더라도 자신의 죽음이 닥칠 때까지는 다시 살아내고 또 살아내는 일을 반복해야 한다. 그러니 대중보다 먼저 깨달음을 얻어 높은 지위나 권력을 가진 사람들도 몰락을 하게 되는 경우가 발생한다.
어느 순간 자기 자신에게 도취가 되고 자기는 남들보다 앞서 나가고 있다는 생각에 지배되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지루함을 견디지 못하는 것이다. 사람이 태어나서 평생 일만 하다가 죽는다고 생각하면 어떻게 될까?
그에 따른 보상심리가 생길 수밖에 없다. 그러나 사회에서 만나는 타인은 내 멋대로 할 수가 없다. 타인은 남이기 때문에 자신의 욕망에 응해줄 가능성이 제로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리고 깨달음을 이용해 자기 자신을 성장시키는데 전력을 다할 것인지 권력과 지위를 획득해 욕망을 해소할 것인지는 전적인 본인의 선택에 달렸다.
이로 인해 바깥으로 새어나갈 가능성이 가장 적은 가족에 대한 폭력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오늘의 뉴스 골자는 이러했다. 부모가 자녀를 버려 시설에 생활하고 있는 손녀를 70대 할아버지가 외출로 불러내어 지속적인 성폭행을 일삼았다고 한다. 감히 추측해 보자면 손녀는 그런 할아버지라도 그리웠을 것 같다. 손녀가 말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나만 참으면 문제 될 게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자신의 삶에서 자기 자신이 참으면 된다는 명제는 성립하지 않는다. 손녀는 시설을 나가기 전에 용기를 내어 신고했다고 한다. 할아버지라는 범죄자는 법정에서 고령을 내세워서 손녀의 행복을 위해 기도할 테니 감경을 해달라고 울먹였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참으로 간사하고 무지하며 용서받지 못할 자격을 모두 갖춘 것만 같다. 최근에 올라온 지방에서 일어난 묻지마 살인에 희생된 여자아이의 명복도 간절히 빌어본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우리는 많은 무지성 타인을 랜덤으로 만나게 된다. 그들에게 우리는 종종 무례를 당하며
생존을 위해 그들의 이기적인 태도와 무례에도 원치 않는 수긍과 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 그러함 속에서 우리는 모두 상처를 받는다. 그리고 치유하지 않는다. 계속 분노를 쌓는다. 그리고 분노는 나보다 힘이 없는 약한 이에게 향한다. 끔찍한 일을 저지르고도 우리는 내일 자신의 생존권을 쥔 곳으로 나가 아무렇지도 않다는 페르소나를 장착하고 웃는다.
'나는 잘못이 없다. 사회가 날 이렇게 만든 것이다.' 라는 면죄부는 더 이상 허용되면 안 될 것 같다. 그런 면죄부에 꽃처럼 피어날 가능성과 사람들이 희생이 된다.
내겐 어두운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기도 어렵다는 사실은 이미 각인이 되어있다. 그러나 말해야 한다. 최소한 그들이 살아있다면 말을 하겠지만, 말할 수 없는 곳으로 떠나버린 사람들.
결국 침묵할 수 없었다.
글이 닿는다면 제도까지 닿기를 소망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