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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워너비미 Mar 16. 2023

When I move

에세이

첫 문장을 쓰지 못하는 날, 잠들 수 없는 상태가 날 더 예민하게 몰아세우는 밤 자주 생각했다.


혼자 고고한 척 순수물질을 보존해 남기고자 하는 이상한 과학자가 아니라 대중이 원하는 것을 그대로 구현해 가져다주는 세공사면 어땠을까? 그렇다면 나는 다수에게 보편성이라는 경계 안의 사람으로 인정받으며 살지 않았을까?


나는 이것을 편한 삶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나의 실험실은 원석을 훔치고자 하는 사람, 혼자 고고한 척하는 것을 못 봐주겠는 사람 그리고 오염자들이 방문한다. 나의 실험실은 오염이 되어도 끊임없이 멸균작업이 이뤄져야 내가 하고자 연구는 성공할 수 있는데 말이다.


사실 방문과 멸균작업은 나를 꽤 힘들게 한다.



실험실을 청소하기 위해 들고 가던 통을 냅다 집어던지고 무너질 때가 있다. 그 후엔 그래도 닦아내야지라거나 있을 만큼 있었던 무너진 자리가 지겨워 자리를 털고 일어난다.



내가 실험실을 포기할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순수물질은 결국 순수물질이란 사실이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사랑은 사랑이고 이별은 이별이고 기쁨은 기쁨이며 슬픔은 슬픔이고 행복은 행복 불행은 불행일 뿐이다.



설명할 수 없다고 느껴지는 것들은 꽤 선명한 것들이기 때문에



그날이었다. 죽은 매미를 본 날. 누군가 보여주고자 했던 보름만이 빛을 내는 밤이어서 내가 본 것은 매미일 수도 아니었을 수도 있지만 매미는 나에게 한 문장을 주었다.



"겨울에 태어난 매미는 죽었다. 때를 모른다는 강렬한 비난으로"



주위보다 넓게 그리고 많이 볼 수 있는 개안력은 축복이자 독배였다. 순수물질들이 신체서 분리되어 수면에 떠올랐을 때 그들은 눈이 있어야 할 자리에 눈이 없는 상태로 시신처럼 몸을 축 늘어뜨린 채 붕 떠올랐다 한 번에 쿵 떨어졌다.


그리고 산산조각 났다. 그 조각들은 생을 구걸하듯 타인의 물질을 찾아 헤매었다.



이를 지켜보는 일. 내가 그 시신이 되는 시기를 인지하는 일은 심히 고통스러웠다. 그런 밤들이 쌓여만 가는 날은 더욱더.



그럼에도 순수물질들이 수십 개의 공이 되어 들어오고 나가는 일은 멈출 수가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나의 몸에 들어오는 공을 통제해 보려는 시도들 뿐이었다.



어떻게 해야 알록달록한 색의 공들은 계속 머물게 하고 주변의 색을 갉아먹는 공은 배출해 안온한 채도를 유지할 수 있을까? 그것은 공들을 마구 휘저어 버리면 되는 일이다.


그럼 까만 공은 더 이상 까만 공이 아닌 전환이 일어난다.



휘저어 버리는 일을 구성하는 한 요소는 몸짓이다. 글자 그대로의 몸짓. 나는 매주 규칙적으로 몸짓을 한다. 서투르던 몸짓은 규칙적인 시간들이 쌓여서 짐짓 자연스러워지고 있다. 아니 연습을 많이 한 후엔 으쓱 까딱 할 정도만큼 잘한다. 그래서 나는 이 몸짓이 좋다. 까만 공들이 쉴 새 없이 나에게 슈팅될 때, 내가 시신이 되어가려 할 때 몸짓은 나에게 귓속말로 속삭이는 날갯짓이 된다.



까만 공은 실험실에서 언제든 다른 색이 될 수 있다고. 그러니 괜찮다고. 힘내라고.



나의 첫 번째 move, 몸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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