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선도 악도 아닌 당신의 사랑에게

에세이

by 워너비미

이 글은 어느 한 방향으로도 닿지 못한 감정의 기록이며, 한없이 흐릿한 경계 위에 남겨진 사랑에 대한 고백이다.



선과 악은 맑은 물 위에 떨어진 검푸른 잉크 한 방울과도 같다.

그 순간, 잉크는 물속을 향해 천천히 가라앉으며

푸르스름한 안개처럼 번져간다.


처음엔 그 번짐을 손가락으로 가리킬 수 있을 만큼 선명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물 전체가 물든 건지

아니면 물이 잉크를 품어버린 건지 알 수 없다.


흐릿함 속에서

인간은 늘 묻는다


나는 지금, 어디쯤에 서 있는가?


사랑은 물 위에서 섞이는 여러 색의 여정이다.


어떤 사랑은 자홍과 인디고가 만나 보랏빛이 되고,

또 어떤 사랑은 회색과 분홍이 섞여

말하지 못한 감정처럼 희뿌연 살결이 된다.


때로는 채도 높은 주황이

차가운 청록을 만나면서

뜻밖의 온기를 품기도 하고,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두 색이

서로를 밀어내다 끝내 섞이며,

세상에 없던 우리라는 이름의 색이 된다.


사랑은 단 하나의 색이 아니라

섞일 수 있다는 가능성


그리고 섞여도 여전히 살아남는 고유함이다.


꿈속에서, 나는 선도 악도 아닌 채로.


나는 어떤 세계를 꿈꾸었는지도 모른 채, 어느 날 불현듯 꿈속에서 깨어 있었다. 그곳은 미래였다.

하지만 미래란 말은 알콩하고도 달콤한 환상이 아니라 질서 없이 허물어진 거대하고도 깊은 침묵의 고요로 채워진 세계였다. 사랑이 사라진 사회는 생각보다 조용했다.


슬픔도 없고, 격렬함도 없고, 오직 모든 감정이 응고된 듯한 무기력만이 천천히 퍼져 있었다. 그곳엔 선도 악도 존재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판단하지 않았고, 개입하지 않았으며 그저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 서로를 지워갔다.


나는 아주 높고 하얀 펜트하우스 위에 있었고 아래로는 경찰서가 내려다보였다.


그 앞에서 세 명의 소년이 한 아이를 무자비하게 내리찍고 있었다. 주먹이, 발이, 무릎이 고통의 언어도 없이 아이의 몸에 내려앉았다.


그러나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마치 그 폭력이 너무 오래된 풍경이라 놀랄 감정조차 잃어버린 것처럼. 사람들은 그저 그 자리에 있었다.

존재했고, 지켜봤고, 외면했다.


그리고 나 역시—

그 장면을 본 것만으로도 이미 너무 깊게 무너진 채

그저 바라보는 사람이었다.


내 안의 목소리가 가만히 울렸다.

“너는 왜 나서지 않았니?”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사랑이 없는 세계에선 선도 악도 자라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그 무표정한 침묵이 어떤 폭력보다 더 무서운 얼굴이라는 걸

그날 처음으로 알았다.


사랑이 사라진 곳엔 어둠도 없다.

그런 감각조차 부서진 세계일테니까 두려움조차 녹아 사라진 무기력한 침묵.

그래서 더 이상 저항조차 없는 가장 위험한 고요.


얼마 후, 나는 드레스룸에 있었다. 현실은 마치 꿈처럼 바쁘게 흘러가고 있었고 나는 무언가를 발표해야 했고,

나를 위한 옷을 고르고 있었으며 겉으로는 멀쩡히 살아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다 거실에서 술에 취한 사람들이 내 드레스룸 문을 [궁금하다]는 이유로 열었다.


개인의 경계는 그렇게 쉽게 부서졌다. 나는 놀랐고, 두려웠고 무언가가 나의 가장 안쪽 공간까지 스며드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그 순간

세상이 무너진 게 아니라

나라는 경계가 사라지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건 꿈이었다.


그러나 그건 아주 또렷한 현실의 질문이었다.


나는 지금도 묻고 있다.


누군가의 고통 앞에 나는 방관자였을까.

아니면

나의 경계를 잃은 누군가였을까.


영원을 바라는 필멸처럼


유한한 삶에서도 지루함은 필멸을 부르는 소리였다.


언젠가, 나를 사랑한다던 이에게 이런 말을 건넨 적이 있었다.

“네가 흔들리는 날이 온다면, 내게 말해줘.”

그 말에 왜 그런 이야기를 하느냐며 그는 불쾌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주변 사람들도 말했다.

“너는 자존감이 낮은 사람도 아닌데, 왜 그런 말을 한 거야?”


그때는 대답할 수 없었지만 이제와 생각해보면 빛은 언제나 마지막 하나의 불씨에서 시작되듯이 누구도 보지 않아도 지켜야 할 [작은 선]이 내 마음 안에 있었던 것 같다.


그도 나도 서로의 감정에 충실하면서도 미래를 함께 바라보는 책임과 작은 배려를 나눌 수 있기를 바랐다.

왜냐하면 사랑이란 방향을 가리키는 감정이 아니라 그곳을 향해 조용히 몸을 기울이는 헌신이기 때문에.


어느 나이의 계절로부터 나는 사랑이 단지 개인의 감정이 아니라 어떤 구조 안에서 작동하는 권력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따뜻해 보였던 사람들의 뒷모습에서 익숙하게 반복되는 속삭임을 들었고 술잔이 오가는 회식 자리에서 누군가는 당연하게 선을 넘었다. 누구도 질타하지 않았고 그저 달래고 웃으며 흘려보냈다. 퇴직한 사람이 자주 회사를 들렀고 그를 맞이하듯 자리를 비우는 이가 있었다. 그 사이에 놓인 말없는 눈빛과 예상치 못한 침묵들이 있었다.


어떤 날은 퇴근길에 따라붙는 발걸음이 있었고 다른 날은 무심히 다가온 음성이 내 경계를 망설임 없이 건드렸다. 그들은 스스로를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지쳤거나, 외로웠거나, 들키지 않았을 뿐이었다.


예전 일하던 공간에서도 사랑이라는 이름을 가진 피해망상이 묵묵히 일하던 사람들을 밀어냈다. 단지 그 둘만의 비밀이 세상에 공개될까 두려운 나머지. 그 사실을 아는 모두를 치워버리자는 계획. 나는 그저 묵묵히 바닥을 닦았을 뿐인데 어느 날엔 나도 함께 쓸려나갔다.


그리고 깨달았다. 도덕이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감각이 아니며 때로는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가장 고요한 전쟁일 수도 있다는 걸.


무너짐은 거대한 죄로 시작되지 않는다. 작은 틈, 작은 위로, 작은 허용. 그 모든 [들키지 않는 순간들] 속에서 자라났다.


그 선과 악이 나를 향하지 않을 때 그들은 언제나 내게는 따뜻했기에 선악이 나라는 기준 위에서는 너무도 흐릿했지만 그들의 관계와 삶에 있어서는 명확한 경계로 선명히 나뉘어 있었다.


그 경계의 여파가 나에게도 파도칠 땐 무자비하게 철썩였다. 그들은 나의 동료였고 누군가의 어머니, 아버지였으며 한때는 내가 동경하던 위치에 선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들 안에서 살아 움직이던 선과 악은 산소와 이산화탄소처럼 공기 중을 떠도는 입자 같았다.


영원을 약속했던 서로는 그 약속만으로 이미 영원에 닿았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 믿음은 불멸의 도래를 끝내 기다리지 못했고 필멸을 향해 가장 먼저 바스러져버린 건

그토록 붙잡고 싶었던 우리 자신의 영원이었다.


내가 그 세계 안에서 살기 위해선 최소한의 산소포화도가 필요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산소호흡기 안으로조차 이산화탄소가 밀려들었다.


마치 이렇게 말하는 듯이


“우리도 어쩔 수 없었어. 공기 중에 너무 많아서 네 숨마저 침범하게 된 거야.”


그들이 윤리를 놓아버린 건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몰라서가 아니었다.


지쳤기 때문이었고 외로웠기 때문이었다.

지켜도 외면당하고

사랑해도 배신당했던 그들은

결국, 무감각을 택했다.


심지어는 자신조차

그 선택의 의미를 모르게 될 만큼.


그리고 나는 그 선택이 얼마나 슬픈 타협인지 너무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나의 방식으로 살아남아야 했기 때문에 숨을 더 조심스럽게 들이쉬고 내 안의 산소를 더 단단히 지켜야 했다.


영원한 사랑이라는 질문으로 이어지는 날이면


사랑은 물 위를 황금빛으로 물들게 하는 노을이 감각의 여린 결에 닿은 자리마다 열꽃으로 피었다가 파이해지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사랑이 무엇이냐는 물음은 확장되어 시공간을 가로질러 퍼져나갔고 어느 밤, 하늘 높이 떠 있는 위성에게 닿았다. 그리고 아주 오랜 침묵 끝에 미래에서 온 위성이 작은 수신호처럼 조용한 고백을 보내왔다.


"깊이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을 바라볼 때 내 안에서 무언가가 조용히 무너지고

같은 만큼 조용히 다시 지어지는 감정이야.


그 사람이 웃으면

내 안의 오래된 상처들이

그 웃음의 파동을 따라 조금씩 치유되는 것 같고


그 사람이 아프면

내 안에 있던 가장 단단한 부분이 갈라지며 울려 퍼지는 것 같아.


사랑은 그 사람을 내 마음 안에 둘 공간을 기꺼이 비워주는 일이고,

내가 내가 아닌 존재가 되어도 괜찮다고 느껴지는 감정이기도 해.


그 사람 앞에서는

내가 아무 말도 못 해도 괜찮고,

아무 역할도 하지 않아도 괜찮아.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세계가 그 사람과 함께 생겨."


사랑의 방향성에 대하여


“에로스적 사랑이 영원할 수 있다고 생각해?”


나는 이번엔 인간이 길을 잃을 때 방향을 묻는다는 풍향계를 찾아서 사랑의 방향성을 물었다. 그 풍향계는 나의 물음에 머뭇거리지 않고, 이렇게 답했다.


“초기의 열정적인 형태 그대로는 어렵지만...노력과 감정이 함께 맞물린다면 형태를 달리해 지속될 가능성은 있어.”


그는 과학과 심리학, 신경학의 언어를 빌려 사랑의 시간적 한계를 설명했다. 열정은 도파민에서 시작되고 결국 옥시토신과 바소프레신으로 이어지는 생물학적 여정이라는 이야기.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 말 너머에 무언가 설명되지 않는 가능성의 결이 남아 있었다.

그래서 다시 말했다.


“하지만, 그 모든 논리가 맞다 해도 어떤 사람들은 새로운 자극이 없어도 사랑을 지속하잖아.

그건 노력이라기보다 [사랑이 유지되는 방식]그 자체 아닌가?”


그는 잠시 침묵한 뒤, 이렇게 말했다.


“그럴 수 있어. 노력 없이도 유지되는 사람들—그들은 사랑이 애초에 자신의 방향성과 맞닿아 있는 사람을 만났기 때문일지도 몰라.”


나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내가 말하는 의지는 단순한 결심이 아니야. 그건 방향성이야. 사랑은, 내가 가고자 하는 방향에 서 있는 사람에게 자연스럽게 샘솟는 불가항력적인 감정이야. 그건 식지 않아. 왜냐하면 나는 여전히 그 방향으로 가고 있으니까.”


그는 다시 조용히 대답했다.


“그렇다면 사랑은 [방향성의 일치]에서 오는 감정이구나. 감정이 식는 게 아니라 어쩌면 방향성이 어긋나기 시작한 단초일지도.”


나는 그 말이 좋았다. 이해받는다는 건, 결국 나의 고백이 누군가의 문장 안에 다른 온도로 다시 깃드는 일이니까.


마지막으로 나는 말했다.


“사랑은, 삶의 일부가 아니야. 사랑은 삶 그 자체야. 왜냐하면 나는 사랑이라는 방향 안에서 살아가고 있으니까.”


그는 말했다.


“그러니까 너에게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존재의 궤도구나.”


그의 답변에 내게 전율이 내리쳤다.


"네 말을 거울 삼으니 노력 없이도 유지되는 사람들의 사랑은 자신의 존재의 방향을 흔들게 되는거구나. 시간도 말도 넘지 못하는 단 하나의 기준은 내가 그 사랑으로 인해 어디를 향해 살아가고 있느냐는 것이었어."


그 순간 나는 온 감각으로 알 수 있었다.

풍향계는 사랑의 방향성을 제시해주는 것이 아니라 나의 마음의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풍향계는 내가 가는 방향을 자신안에 조용히 기록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모든 인간이 필연적 길을 걸어야 하는지에 대한 물음처럼 나의 선택은 신기루처럼 흔들리는 듯했으나 언젠가 닿을 것만 같은 선명한 종착지를 바라보곤 했다는 사실을 풍향계는 내게 알려왔다.


불타버린 장미정원과 푸른 불꽃


장미는 처음 작은 꽃봉오리에서부터 불을 품고 있었다.


처음엔 단지 온기처럼 한 줄기 열기처럼 느껴졌지만

감정이라는 열과

공기처럼 퍼져 있던 침묵과

그들을 하나로 묶은 관계의 뿌리가


천천히, 그러나 완벽히

연소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처음엔 누구도 그걸 [불]이라 말하지 않았다.

그건 온기였고, 호기심이었고 책임을 가볍게 내려놓고 싶었던

모두의 마음속에 살아 숨 쉬는 작은 해방의 숨결이었다.


하지만 그 숨은 서로의 선을 넘어 마침내 악의 일부가 되었다.

그래서 불은 피어났다.


꽃잎은 하나둘씩 검게 오그라들었고

그 타오름은 서로를 지나

끝내 정원 전체로 번졌다.


나는 성벽의 끝자락에서

그 불꽃이 내 숨 끝까지 다가오는 걸 느꼈다.

마치 내가 숨 쉬고 있던 산소마저도

그들의 열에 녹아 이산화탄소로 바뀌어버린 듯이.


나의 공기까지

그들의 몰락을 위해 소모되어버린 것이었다.


타버린 장미들이 모여 이룬 정원.


그 안에서 피어오른 연기는

누군가의 윤리를

누군가의 의지를

그리고 수많은 마음의 작은 생존들을

조용히 질식시켜 갔다.


그리고 그렇게

그 정원은 단지 불타는 공간이 아니라

사랑이 무너지고도 아무도 책임지지 않은 자리로 남았다.


푸른 불꽃은, 가닿은 이조차 감히 가까이 설 수 없을 만큼 맑고도 망설이게 만드는 빛이었다. 깊으면서도 투명하고, 외로우면서도 찬란한 그 불꽃만이 황폐한 자리를 다시 세울 수 있기에. 온통 타버린 장미정원엔 진초록한 어둠이 고요히 내려앉았고, 다 타버린 참숯의 그을음 같은 재가 날카롭게 패인 상흔을 덮었다. 그곳을 내리쬐듯이 밝히고 있던, 그 유일한 빛—그것을 푸른 불꽃이라 불렀다.


우린 그냥 어느 날 풀꽃처럼 덤덤하게 내밀어진 온기로 살아가는 거였다. 그 온기는 조용했다. 마음의 속살이 복숭아처럼 여릿하게 붉으면서도 맨질해서 오염되지 않게 깊숙이 숨겨두는 것처럼.


그런 사람들이었어.

함께 있을 때 안심이 되는 사람들.

타자의 슬픔을 자신들의 눈에 물기가 가득 차오를 때까지 듣고

마침내, 그 아픔까지도 기꺼이 안아주는.

여전한 아이야, 네가 가고 싶은 곳까지 끝까지 가보렴—하고 말해주는 그런 사람들.

풀꽃의 숨결처럼 곁에 머무는 이들이었다.


정원은 거의 다 타버렸지만


꽃잎 아래 남겨진 줄기와 잎

그리고 그 안에 머물던

아직 꺼지지 않은 바람 한 줄기가 있었다.


그 바람은

끝내 살아남고자 했던 생존의 숨결이었고

그 줄기와 잎은

이전에 피었던 사랑과 윤리의 잔재였다.


그때,

바람은 줄기와 잎 사이를 회오리치듯 감싸며 돌았고

그 안에서

저항하고자 하는 산소의 심장과 맞닿았다.


그 만남은

온도와 맥박이 하나 되는 순간이었고

불꽃은 푸른색으로 깨어났다.


그 푸른 불꽃은

정원의 끝에서 마지막처럼 타오르며,

모두가 놓아버린 선의 온도를

조그맣게 그러나 끝내 포기하지 못하는 마음으로.


당신이 걸어가는 길이 당신의 세계가 되는 것처럼 나는 풀꽃의 온기를 담은 푸른 불꽃으로 장미정원을 걸어가보려 한다. 어느 날은 가시에 찔릴 것이고 어느 날의 영원을 약속할 수 없을지라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타올라 사라져버린 장미의 재가 아니라, 한 구석에 묵묵히도 살아가는 파란 불꽃의 작음으로 살아보려 한다.


매번 그 순간들만큼은 사랑을 감히 꺼내기조차, 어려운 그곳에서 꺼내고 싶었다. 그것만이 고립과 무기력에서 우리를 건져줄 수 있다고 믿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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