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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찰스 May 08. 2016

오래된 것들의 위태로움

이별 편

- 오래된 것들의 위태로움 -


저처럼 종종걸음으로
나도 누군가를 찾아나서고 싶다

- 황인숙, 「비」를 인용.


"그러고 보니, 너도 참 늙었구나."


대학시절, 자취를 시작하며 야심 차게 준비한 빨간 스탠드 녀석. 한 인터넷 쇼핑몰에서 단돈 만 원에 사, 일이 년 정도 쓸 줄 알았더니, 세상에 이걸 십 년이나!


'딸깍' 소리와 함께 환한 불빛이 내 마음속을 파고들었다. 어쩐지 사랑이라던가, 꿈이라던가, 삶 같은 것들 역시 준비되지 않은 상태로 만나, 아무 생각 없이 혹은 그저 익숙해진 채로 관계 맺고, 이어가고, 흐르는 게 아닌가 싶어서.


"생각해보면, 처음 만났을 때의 너는 참 예뻤지."


그래, 이 녀석의 빨강은 화려함으로 반짝이는 루비의 빨강이나, 가끔 음침한 구석이 엿보이기도 하는 와인의 빨강이 아니라, 개구진 표정의 함박웃음 철철 넘치는 튤립의 빨강이었다.


'빨강이 그냥 빨강이지, 그것 참 유난스럽게도 표현한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나에겐 정말 유난스럽게 예뻐 보였다. 게다가 가끔 비위를 맞춰주지 않으면 제멋대로 심술을 부리던 검정 모가지는 어찌나 귀엽고 정겹던지.


"그럼에도 우리는 익숙해졌나 보다. 유별하고 색다른 감흥이던 네가 매일만큼 조금씩 익숙해졌나 보다."


이대로라면 곧 먼지가 쌓일 대로 쌓여 고개가 부러질 것만 같던 이 녀석을 보며 생각했다. 내가 하고 있는 사랑은 어떠한가. 내가 품었던 꿈이나 내가 걷고 있는 이 길의 방향이, 익숙함이라는 가면 뒤에서 조금씩 부서지고 있지는 않나. 살금살금 흐르는 시간에 속아 무감각한 관계를 맺고 있지는 않나.


'딸깍' 소리와 함께 조금 쓸쓸할 것 같은, 오늘 밤이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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