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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찰스 Jun 17. 2016

Y에게 쓰는 편지

이별 편

- Y에게 쓰는 편지 -


하긴 이제 와 생각하면 약속만큼 터무니없는 게 또 있을까 싶다. 사랑의 약속이란 그 순간의 감정일 뿐, 이별 후에는 저절로 잊히거나 잊고 싶은 기억이 되어버릴 텐데.

- 황경신, 「국경의 도서관」중.


Y에게.


나는 이번 사랑을 통해 배운 걸 하나 이야기 하기 위해서 편지를 써. 너는 내가 사랑을 시작할 때마다, 사랑이 끝났을 때 무언가를 배웠다면 그걸 가르쳐 달라고 했었잖아.


사랑의 어구들은 가벼웠어. 사랑의 약속들은 참을 수 없이 가벼워서 이별이라는 글자가 떨어지면 먼지처럼 흩어졌어. 수도 없는 다짐과 빽빽했던 대화들은 아무것도 아닌 게 되어버렸지.


그가 날 떠나지 않겠다는 말이 그러했고, 내가 그를 간직하고 싶다는 말이 그러했어. 그가 날 포기하지 않는다는 말이 그러했고, 내가 그를 영원토록 사랑하겠다는 말이 그러했어. 겉으로는 강철처럼 단단해 보이던 약속들이 겨우 몇 마디 말 때문에, 몇 번의 실수 덕에, 얼마 간의 시간 앞에 하릴없이 분쇄되었다는 거야. 이 얼마나 가벼운 단어들이야. 사랑, 결실, 함께, 오래오래, 위로, 오직, 당신만을.


사랑의 약속들이 거짓이라면, 이별은 언제나 진실해. 나는 혼자인 것에 대해 막연한 두려움을 느끼는 사람이었고, 그 두려움이 싫어 누구에게든 사랑을 구걸할 정도로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었어. 이게 진실. 그가 내게 주었던 마음은 어설피 조작된 사랑이었고, 그는 사실이 들통나니 고작 사흘 만에 나를 지워낼 수 있는 사람이었어. 이런 게 진실.


특별할 것은 없지만, 그래도 이번 사랑을 통해 유일하게 배울만 했던 건 이런 것들이야. 어때? 나는 이번 사랑을 통해 좀 성장할 수 있을 것 같아? K는 내가 예전보다 더 철이 없어진 것 같다고 하더라고. 바라는 게 하나 있다면, 다음번 사랑은 아무도 떠나지 않는 사랑이었으면 좋겠어. 상대방도, 나도 서로의 자리를 그대로 지켜 낮은 바람에 쉬이 날아가지 않는, 가볍지 않은 사랑이었으면 좋겠어.


다음 사랑이 시작될 때 또 편지할게.




* 황경신 작가님의 책 일부를 요 며칠 매번 가져다 쓰고 있는데, 오늘은 인용구 뿐만 아니라 글 형식 전체를 오마주하여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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