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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찰스 Jul 03. 2016

자리를 지키다가 떠난 남자

이별 편

- 자리를 지키다가 떠난 남자 -


"그 사람 정말… 나, 기다렸어?"
"말하기 싫어요."
여학생은 입술을 삐죽거리며 고개를 돌린다.
"…그래."
"기다렸으면 어쩌게요? 지금 와서."

- 황경신, 『슬프지만 안녕』중.


그 자리를 일 년 동안 지킨 남자가 있다. 별로 뜨겁지 않게 살아온 남자가 아주 뜨겁게 사랑했던 여자를 만나기 위해, 남자는 자주 그 자리로 돌아왔다. 그 자리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그 여자가 좋아해주던 글을 쓰고, 좋아하는 작가의 책을 읽고, 온몸으로 그리움에 안겨 있다가, 영업시간이 끝났다는 직원의 안내와 함께 집으로 돌아갔다.


사실 그 자리로 돌아오는 행위에 어떤 의미가 있나 싶지만, 남자는 꿋꿋이 돌아왔다. 추억은 아픔과 상실을 덜어 밝고 예쁜 추억으로 남았으나, 기억은 여전히 아슬한 상처와 아릿한 슬픔을 간직한 기억으로 남아있으니 그런 미련해보이는 행동을 반복한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처음에 남자는 하고 싶은 말이 남아있었다. 그리하여 남자는 그 자리에 앉아 편지를 썼다. 혹시라도 어떤 날에 그 여자를 마주쳤을 때 전하기 위한 편지였다. 편지엔 그리움을 담은 단어들이 휘날렸다. 원망을 담은 단어들도 꼭 그만큼 휘날렸다. 또 가만히 앉아 그 여자와의 시간을 돌아보다, 목소리를 떠올려보다, 아주 가끔 희미한 웃음을 지어보기도 했다.


시간이 얼마 지난 뒤의 남자는 이제 웃지 않는다. 절망한다. 주저앉는다. 실낱같은 희망이, 뜨거웠던 불길이 식어빠진 잿더미로 변하기 전에 꼭 한 번 만나지 않을까.했던 희망이, 흐릿하게도 보이지 않게끔 달아나고 말았으니.


그런 이유로 남자는 여전히 글을 쓰지만 그 여자를 위한 편지나, 그 여자를 그리는 글은 쓰지 않았고, 그 여자의 목소리가 생각나지 않았고, 밝고 예쁜 추억이나 상처와 슬픔을 간직한 기억들은 어떤 의미도 가질 수 없는 시간이 되고 말았다.


그러다 언젠가, 색을 잃고 쳐다보던 남자의 풍경에 어떤 사람이 들어왔다. 역시 봄인 것처럼. 그 사람은 검은 장막으로 꽁꽁 덮여있던 남자의 세계를 찢는다. 그리고 하늘은 하늘색이며, 꽃은 노란색이라고, 나무는 초록색이고, 자신의 마음은 분홍색이라고 말한다. 남자는 점점 자리로 돌아오는 일을 잊어간다. 생각하는 사람이 점점 바뀌어 간다. 볼 수록 아팠던 남자의 시는 다시 두근거리는 시어들로 채워져 간다.


그리고 마침내, 계절이 여름의 향을 몰고 왔다가, 가을의 낙엽들을 떨어트렸다가, 겨울의 옷깃을 여미게 했다가, 다시 두 번째 봄에 이르러서야, 남자는 그 자리에 돌아오지 않았다.


남자가 떠난 빈 자리는, 그저 빈 자리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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