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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찰스 Jul 22. 2016

붉은 실

사랑 편

- 붉은 실 -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 나태주, 『풀꽃』중.


아주 지루하고 힘든 밤을 보내고 난 뒤 아침을 알리는 매미소리와 함께 잠이 든 남자가 있다. 이제 막 잠이 든 남자에게 여자는 아침 인사를 보냈다. 남자는 보지 못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루의 무게에 휘청거리고 있을 오후 네 시쯤, 남자가 눈을 떴다. 여전히 자신에게는 아침 인사였을 여자의 메시지를 본다. 안경을 쓰지 않은 탓에 흐릿한 세상이었고, 얼굴의 반쪽은 아직도 베갯잇 속에 파묻혀 있었지만, 남자의 하루가 보람 있는 하루이길 바란다는 여자의 메시지가 선명하고 기분 좋게 읽혀졌다. 도무지 웃지 않을 수가 없어 지친 입을 열어 미소를 지었다.


하루가 이미 기울어가던 때에 눈을 떴으므로 남자에게는 다시 밤이 찾아왔다. 해는 지구 반대편으로 숨어버렸으니 남자는 세수를 하고 머리를 감고 자신의 자리를 찾아왔다. 가끔은 손님이 많아 시끄럽기도 하지만 대부분 한산하고 조용한 카페다. 가게 주인으로 보이는 여자는 이제 남자가 메뉴를 정해 말하지 않아도 시원한 커피 한 잔을 내어준다. 남자는 자리에 앉아 책을 읽는다. 책 속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사랑이 소개된다. 그만큼의 이별도 적혀있기 때문에 아름답기만 하거나 슬프기만 한 책은 아니다. 그래서 남자는 쓸쓸해진다. 자신의 차례는 마침 이별 편에 맞추어져 있다.


그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온다. 남자에게 아침 인사를 건네주던, 도무지 웃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던 그 여자다. 그건 남자와 여자의 첫 통화였다. 한 번도 어딘가에 존재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다시 말해, 어딘가에 존재할 거라 생각도 해보지 못했던 여자에게 걸려온 전화를, 남자가 받았다. 기어이 남자가 전화를 받아버렸으므로 어쩌면 일생동안 서로의 존재를 느낄 수 없었던 사람들 사이에 붉은 실 하나가 묶였다.


목소리가 예뻐요. 남자가 말했다. 꺼내어지는 목소리의 톤과 음정, 소리의 색이나 리듬, 간간이 그 사이로 끼워지는 웃음까지.라고 설명하기에는 복잡하고 어지러워 남자는 그저 예쁘다고만 말했다.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온기가 아주 오랜만이라 남자는 기분이 좋다. 마치 전화기 너머에 있는 사람의 품에 안겨있기라도 한 듯 포근함을 느낀다. 아침에 지었던 미소보다 훨씬 더 크고 뚜렷한 무지개가 남자의 얼굴에 그려진다.


다시 내일 아침이다. 남자의 손에는 기차표 한 장이 들려있다. 남자는 여자를 만나러 가기로 했다. 그리고 거기에서 남자는 분명히 자신을 안아주었던 목소리를 만나기로 했다. 그곳에서 만날 온기는 한동안 얼어있던 자신을 품어 한없이 한없이 녹여줄 것이라고, 남자는 생각하며 여자가 읽어주었던 나태주 시인의 풀꽃을 다시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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