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린 시절부터 컴퓨터와 그리 친한 편은 아니었다. 게임을 가끔 하곤 했지만, 푹 빠진 적은 거의 없었다. 컴퓨터가 고장 나면 스스로 고칠 생각은 하지 않았다. 컴퓨터를 잘 만지는 친구에게 부탁하거나 동네에 하나씩 있던 컴퓨터 수리 업체에 맡겼다. 프로그래밍에는 대학교에 오기 전까지 관심조차 가진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현재 IT 직종에서 밥을 벌어먹고살고 있는 것을 보면, 삶이란 정말 우연적인 요소에 의해 만들어져 나가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나는 고등학교 때 문과였고, 대학교에서 처음에 전공한 학과는 경제학과였다. 많은 문과 전공생들이 그렇듯, 취업할 때가 되자 좁은 취업문과, 그 좁은 문을 비집고 들어간 이후에도 맞이하게 될 커리어의 불확실성에 대해 위기감을 느꼈다. 그때쯤 IT 산업은 인공지능과 하드웨어의 급속한 성장, 그리고 코로나의 등장 등의 요인으로 인해 부흥하고 있었다. 개발자 구하기가 어렵다, 개발자 몸값이 천정부지로 올라가고 있다는 말이 들려왔다. 문과 출신이었다가 개발자로 전향한 사람들의 이야기도 유튜브에서 심심찮게 들을 수 있었다. 그러던 와중 교내 매거진에서, 동아리 선배의 인터뷰를 보게 되었다. 학생들의 성공 사례를 다루는 코너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와 같은 문과였던 그 선배는, 컴퓨터공학과를 복수 전공했고 개발자로서 취업에도 성공했다. 오랫동안 연락하지 않았던 그 선배에게 연락했다. 선배는 너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해줬고, 나는 용기를 얻었다. 다행히도, 그때는 내가 컴퓨터공학과 복수전공을 시작할 수 있었던 마지막 학기였다. 나는 25살, 3학년 2학기에 컴퓨터공학과 복수전공을 시작했다.
컴퓨터공학과 복수전공은 예상했던 것처럼 쉽지 않은 길이었다. 5살은 어린 신입생들에게도 뒤쳐지는 기분은 처음 느껴보는 종류의 것이었다. 하지만 졸업이 목표라면, 불가능할 정도로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예전에 대학 생활 하던 것에 비해 시간을 훨씬 많이 쏟아서 공부했다. 정신없이 과제와 시험을 쳐내다 보니, 어찌어찌 졸업 학점을 채울 수 있었다. 마지막 학기가 마무리될 무렵, 선배가 취업한 회사에 인턴사원으로 지원했고 운이 좋게도 합격했다. 인턴 기간 동안 잘 알지도 못하는 지식을 이용해 발표 자료를 만들고, 발표를 했다. 정규직 전환을 아예 기대하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떨어지더라도 납득하지 못할 일은 아니었다. 다시 한번 운이 좋았다. 정규직이 되어 계속 월급을 받고, 밥도 먹고, 지급받은 컴퓨터도 계속 쓸 수 있게 되었다.
회사에서 컴퓨터와 관련된 여러 일을 했다. 가상머신의 성능을 튜닝하기도 하고, 서버 개발도 했다. 요즘은 클라우드 인프라와 관련된 일을 하고 있다. 이 일을 하는 것이 나의 천직이라고 느껴지지는 않는다. 앞서 말했듯 나는 컴퓨터에 어린 시절부터 큰 관심이 있지는 않았고, 생계나 커리어의 관점에서 IT 계열의 직업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컴퓨터는 사람보다는 덜 변덕스러워서 좋다. 내가 컴퓨터를 잘 이해하고, 제대로 된 명령을 내려준다면, 컴퓨터는 내 말을 잘 들어준다. 하루 종일 사람을 대하는 일보다는, 컴퓨터를 대하는 일이 나에게는 좀 더 나은 것 같다. 앞으로 컴퓨터와 관련된 일을 얼마나 하게 될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 시간들이, 어떤 사람과 점점 더 좋은 친구가 되어가는 시간과 같았으면, 하고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