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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갖는다는 것에 대하여

by 여립

살아가면서 다른 사람들이 어떤 결정을 하는 것을 보고, 어떻게 저런 결정을 저렇게 쉽게 할까 하는 생각이 드는 때가 종종 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아이를 갖는 결정이다. 내 주위의 또래들과 대화하다 보면, 놀랍게도 많은 이들이 구체적으로, 또는 막연하게 아이를 갖는 것을 생각하는 것 같다. 반대로 누군가 나에게 아이를 가질 생각이 있냐고 물어보면, 나는 확실하게 대답하지 못하는 편이다. 그 결정이 나에게는 너무도 무겁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아이를 갖겠다고 결정하는 것은 아이가 성인이 될 때까지 최소한 약 20년 동안 부양하겠다는 것을 선언하는 것일 테다. 나는 지금 아이를 키우기에 재정적으로 큰 문제는 없지만, 앞으로 20년 동안도 그럴 것이라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 언젠가 돈을 번다는 것이 굉장히 버거워질 때가 올 지도 모른다. 그럴 때 나와 배우자는 죽을 때까지 충분히 생활이 가능한 만큼의 자산이 모여 있다 하더라도, 아이를 위해서는 비참함, 모멸감을 견디며 계속 일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 나는 그것이 두렵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이를 갖는다는 행위가 가지는 절대적인 이점이 불명확하다는 것이다. 먼저 부모에게 아이가 행복을 주기 때문에 아이를 가지는 것이 좋다는 의견에 대해 생각해 보자. 나는 부모에게 아이가 행복보다 불행을 안겨주는 사례를 많이 알고 있다. 내가 그 사례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을까? 그리고 아이가 나에게 행복을 준다는 것을 상수로 가정하더라도, 그 이유만으로 아이를 갖는 것이 “옳은” 결정일까? 그것만으로 결정을 내리는 것은 아이를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대하는 것일 테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 인간으로서 태어나는 것이 아이에게도 과연 절대적으로 좋은 일인지 따져봐야 한다.

분명 모든 시대를 통틀어보면 객관적으로 지금이 인간의 삶이 가장 풍요로운 시대일 것이다. 하지만 물질적으로 부족함이 없다는 것이, 인간의 삶이 살아봄직한 이유가 되는가? 삶에는 물질적인 빈곤 이외에도, 수많은 존재적 어려움이 도사리고 있다. 불안과 우울, 외로움, 혐오와 갈망. 이 것들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사람은 완전히 깨달은, 극히 소수의 존재뿐이다. 존재적 어려움, 슬픔은 타인이 완전히 해결해 줄 수 없는 종류의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스스로 그런 어려움과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구축해야 한다. 하지만 누구나 그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존재적 어려움이 누구든 같은 무게로 짓누르는 것은 아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 무게를 끝내 감당하지 못한 사람들이, 스스로 삶을 종료하고 있다. 슬프게도, 그런 사람들은 이 땅에 가장 많다. 이러한 고통의 장에 다른 존재를, 의사도 묻지 않고 참가시키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그 질문에 나는 도무지 쉽게 긍정할 수가 없다.

그럼에도 희망을 노래한다면, 인간의 삶은 좋지만은 않아도 한 번쯤 살아봄직한 것일지도 모른다. 아이를 이 세상에 참여시키는 것에 따르는 가장 두려운 일 중 하나는, 아이가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을 결국 후회스럽게 생각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하지만 살아가면서 느끼는 것 중 하나는, 삶의 궤적이 만족스럽지만은 않아도, 그 궤적을 따라 걸었던 것이 후회되지는 않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과거로 돌아가면 똑같이 할 것 같지는 않지만, 그렇게 걷는 것이 그때는 나름대로 최선이었고, 그 길에서 얻은 것도 있으므로 후회되지는 않는다는 회고를 종종 하곤 한다. 어떤 경험이 종합적으로 좋은 것이었는지와, 그 경험을 후회하는지 사이에, 상관관계는 어느 정도 있을지언정 인과관계는 없는 것 같다. 이 명제는 분명 모순적이지만, 최소한 삶을 긍정하는 데 조금은 도움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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