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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올해 스물아홉이 되는, 대한민국에 살아가는 평범한 청년입니다. 아니, 이제는 ‘평범한’이란 수식어를 떼어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현재 전**FSGS(FocalSegmental Glomerulosclerosis, 국소분절성 사구체 경화증)**라는 희귀 난치성 신장 질환을 앓고 있으니까요.
익숙해질 법도 한데 여전히 낯선 병원 진료 대기실에 앉아 있습니다. 흰 벽과 차가운 의자, 소독약 냄새가 가득한 이곳에서 제 이름이 불릴 때마다 심장은 여전히 두근거립니다. 시계 초침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리는 이 공간에서, 저는 매번 제 운명을 결정지을 숫자들을 기다립니다.
대기실 모니터에 제 이름이 깜빡입니다. 심호흡을 깊게 한 번 하고 진료실 문을 두드립니다.
“들어오세요.”
목소리가 들려오자 문을 열었습니다. 교수님은 컴퓨터 화면만 바라보신 채 저를 맞이하셨습니다. 그분 얼굴의 그림자가 이미 나쁜 소식을 예고하는 듯했습니다.
“잘 지내셨나요?” 교수님의 목소리에는 무거움이 담겨 있었습니다.
“네, 별일 없었습니다. “라고 대답했지만, 저희 둘 다 그 말이 얼마나 공허한지 알고 있었습니다. 약병을 열고 스테로이드 16알을 삼킬 때마다, 제 삶에는 ‘별일’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었으니까요.
교수님은 컴퓨터 화면에 띄워진 검사 결과를 오래도록 응시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안경을 벗으시며 깊은 한숨을 내쉬셨습니다. 그 한숨 속에는 의사로서의 무력감이 묻어있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약물에 대한 반응이 전혀 없습니다."
그 말을 듣곤 저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습니다. 병원 창문 너머 봄 하늘은 맑고 투명했습니다. 저 푸른 하늘과는 달리, 제 안에서는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고용량 스테로이드 치료를 이어오셨지만, 현재로서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네요."
저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동안의 투병 생활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습니다. 스테로이드의 부작용으로 찾아온 이 모든 고통이 결국 헛된 노력이었다는 사실이 조금은 섭섭하네요.
“상태가 생각보다 빨리 진행되고 있습니다.”
교수님의 손가락이 모니터의 숫자들을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단백뇨도 더 늘었고, 콜레스테롤 수치도 900mg/dL이 넘었어요. 알부민 수치도 1.6으로 오히려 더 떨어졌고요.”
제 몸에서 단백질이 물처럼 쏟아져 나가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마치 가뭄에 말라가는 땅처럼, 제 몸은 서서히 그 생명력을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신장 기능도 빠르게 저하되고 있습니다. 이 정도 속도라면…”
교수님의 말씀이 흐려지고 진료실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습니다. 창밖에서 들려오는 새소리와 멀리서 들려오는 병원 안내 방송만이 그 정적을 깨고 있습니다.
이젠 제가 가장 두려워하던 질문을 입 밖으로 꺼낼 차례인 거 같습니다.
“투석을 할 수도 있을까요?”
저에겐 투석을 받아선 안 되는 이유가 있습니다. 앞으로 차차 들려드릴 이야기지만, 저는 그 길만은 피하고 싶습니다.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견뎌야 합니다.
교수님께서는 모니터에서 시선을 떼고, 진지한 눈빛으로 저를 바라보셨습니다. 그 눈빛에는 안타까움과 미안함, 그리고 무력감이 뒤섞여 있었습니다.
“질병의 진행 속도가 매우 빠르고… 단기간 내에 응급상황이 생겨도 전혀 이상할 게 없습니다.”
교수님은 제 표정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갔습니다.
“확답은 드릴 수 없지만… 그럴 가능성은 염두에 두고 계셔야 합니다.”
교수님의 말씀에 조용히 귀 기울이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혼란스러워야 할 순간에, 오히려 모든 것이 선명해지는 느낌이었습니다.
‘투석’이라는 두 글자가 제 귀에 맴돌았습니다.
그동안 필사적으로 거부해 왔던 그 현실이 이제 제 앞에 놓여있습니다. 진단을 받은 그 순간부터, 이 길의 끝이 어디인지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지만, 막상 그 현실과 마주하니 숨이 턱 하니 막히네요.
잠시 침묵이 흐른 후, 교수님께서는 컴퓨터 키보드를 두드리며 제 진료기록을 살펴보셨습니다.
“꼭… 저희 병원에서만 치료를 계속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 말에 저는 고개를 들었습니다. 교수님의 눈빛이 흔들렸습니다.
“조금 더 큰 병원으로 옮기고 싶으시다면, 내원기록을 정리해 드리겠습니다. 그게… 더 나은 방향일 수도 있습니다.”
가슴 한구석이 무너져 내리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배려 섞인 말씀이었겠지만, 그 순간엔 저를 조용히 포기하는 선언처럼 들렸습니다. 더 이상 해줄 수 있는 게 없다는, 이제 다른 곳을 알아보라는, 암묵적인 체념 같았어요.
진료실 형광등 불빛이 유난히 차갑게 느껴졌습니다. 숨이 막히는 듯했지만, 저는 늘 그렇듯 웃음으로 그 순간을 넘겼습니다.
“다른 곳 가 봐야 별다를 게 있겠습니까. 다음 주에 뵐게요 “
제 말에 교수님은 미소를 지으셨지만, 그 눈빛에는 깊은 안타까움이 서려 있었습니다. 애써 밝게 웃는 절 안쓰럽게 바라보시며, 이런저런 주의사항을 끝으로 오늘 진료가 마무리되었습니다.
진료실 문을 열고 나오는 순간, 병원 복도 특유의 희미한 소독약 냄새가 코끝을 스쳤습니다.
오랜 시간 반복됐던 검사와 진료 끝에, 이 공간도 이제는 더 이상 낯설지 않았습니다. 마치 제 삶의 일부가 된 것 같아요.
복도를 걸으며 주위를 둘러보았습니다. 휠체어에 앉아 있는 노인들, 링거를 맞으며 천천히 걸어가는 환자들, 불안한 표정으로 검사 결과를 기다리는 사람들… 그리고 그 사이에 홀로 걷고 있는 제가 있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제가 갑자기 병에 걸려 쓰러진 줄 압니다.
하지만 저에게 이 모든 상황은 갑작스러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제 그 시간들을 천천히, 조심스럽게 꺼내어 보고자 합니다.
유쾌하거나, 재밌는 이야긴 아닐 겁니다.
그저 한 사람이 걸어온 길, 아프고, 흔들리고, 버텨낸 시간에 대한 조용한 기록일 뿐입니다. 그리고 이 길 위에서 저는 쓰러지거나 포기하지 않고 여전히 서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