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친아, 엄마 친구 아들의 줄임말이다. 나보다 더 잘 나가는 인물과 비교될 때, 혹은 주변 선망(羨望)의 대상을 가리키는 대명사로 활용된다. 엄친아는 학교를 졸업한 성인보다 재학 중인 특히 십 대들 사이에서 많이 언급되는 인물들이 엄친아로 불린다. ‘엄친아’라는 말은 근래에 들어 생겨난 말이지만 과거에도 존재했고 지금도 존재하고 있다.
S는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동창이었다. 각별할 만큼 친한 사이는 아니었어도 독서실에 다니면서 같이 어울렸던 때가 있었다. 엄마들도 같은 동네 같은 교회 교인으로 서로의 자식들을 알고 있었다. S는 큰 키에 날렵한 몸매를 지녔다. 초등학교 졸업 사진을 보면 여느 아이들보다 준수하고 잘생긴 외모를 지녔다. 그때도 S는 아이들 사이에서 인기도 제법 있었고 공부도 잘하는 아이였다. 운동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중학교에 들어가선 전교 학생회장까지 맡았다. 동급생은 물론이요, 선생님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많았다. 요즘 말로 셀럽이었다. 그런 그의 이력은 고등학교에 들어가서도 그 명성을 이어 매년 수학여행 때 장기자랑 진행을 맡기도 했다.
고등학생이 되면서 각자 선택한 제2 외국어가 달라 어울릴만한 일이 없던 때에 S로부터 전화가 왔다. 내가 다니고 있던 교회 고등부로 나올 생각이라 함께 갈 수 있겠냐는 전화였다. 친분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었고, 뜸해진 관계 속에서 그 부탁은 오히려 반가운 부탁이었다. S는 성경 공부 시간에도 본 예배 시간에도 평소와 다르게 표정이 굳어 있었다. 처음이라 그렇겠거니 했지만, 거기엔 이유가 있었다.
S가 염두하고 있었던 교회는 따로 있었다. 당시에 나는 엄마가 다니던 교회를 다녔고 S는 자기 엄마와 다른 교회에 다니고 있었다. 교회에 다니는 부모들은 보통 자신의 자녀들도 같은 교회에 데리고 간다. 다만 다니는 교회가 집과 인접한 곳이 아닌 조금 먼 곳에 있으면 자녀가 어느 정도 성장할 때까지 집과 인접한 곳으로 보냈다가 나중에 본인들이 다니는 교회로 자녀를 이적(移積)시킨다. 나 역시 혼자 버스를 타고 다닐 수 있는 나이가 되면서 엄마가 다니던 교회로 이적했다. S의 엄마도 그럴 의도가 있던 것 같았지만, S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던 것 같았다.
집으로 오는 길에 S는 사정을 얘기했다. 다니고 싶었던 교회는 같은 중학교 동문이 1회 졸업생부터 출석하는 교회라고 했다. 낯선 사람보다 익숙한 사람이 더 편한 것도 사실이다. 그런 그를 설득할 이유는 없었다. 그리고 그것이 S와 나눈 마지막 대화였다. 그 뒤로 같은 학교에 다녔지만 어울리는 친구들이 달라지면서 더 이상 S와 대면할 일은 없었다. 그저 수학여행에서 장기자랑 진행자로서의 그만 바라본 것이 전부였다.
학교를 졸업했다. 어쩌다 S가 생각나면 지금쯤 어디 괜찮은 대학에 입학했겠거니 생각했다. 변변치 못하다는 말도 부끄러울 정도의 성적으로 졸업한 나는 대학을 포기하고 자격증 공부와 아르바이트를 병행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엄마로부터 S의 소식을 들었다.
S가 아직 대학에 진학하지 못했다는 소식이었다. S의 엄마를 통해 전해 들은 얘기로는 S가 기대했던 것과 다르게 고등학교 생활에 어려움을 겪었다는 얘기였다. 성적이 부진한 것은 어쩔 수 없다지만 자주 중학교 시절을 언급하며 그때를 그리워했다는 얘기였다. 그러고 보니 그때 S가 중학교 동문이 줄지어 있던 그 교회를 고집했던 일이 생각났다. 그 뒤로 몇 해가 더 지났는지 모르겠다. 이번에 전해 들은 얘기는 S가 몇 수를 했는지 모르겠지만 대학에 진학했다는 소식이었다. 경기권에 있는 대학이라고 했다. 대학의 ‘대’ 자도 꿈꾸지 못했던 나로서는 그것도 부러웠지만, 초등학교부터 늘 승승장구하던 S의 입장에선 큰 성과를 내진 못한 것 같았다. ‘걔가 거기밖에 못 갔나?’하는 생각도 들었다. S애 대한 소식은 후에 평범한 직장인으로 그리고 적령기가 되어 결혼했다는 소식이 마지막이었다.
L은 원래 강남에 있는 중학교에 다녔다. 대단지 아파트 개발로 가족들이 이사를 오면서 전학 온 학생이었다. 강남에서 넘어왔고 곱상한 외모에 공부며 운동도 잘했고 악기도 능숙하게 다뤘다. 그래서인지 L은 늘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L도 같은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L은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음대 진학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그 당시엔 하다 하다 안되면 예체계로 빠지는 경우가 많았다. 실기 비중이 높아 대학 진학이 유리할 것으로 판단됐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남들의 입에서 회자되는 상위권 대학은 그렇지 않았다. 실기도 뛰어나야 했지만 내신이며 학력고사 성적도 뛰어나야 했으므로 어떻게 보면 일반계 진학보다 더 어려운 것이 예체계였다. L은 그것을 모두 잘 유지했다. 원체 엄친아였으므로 뒤에서 쏟아부은 노력이 어느 정도일지 생각은 아니하고 그저 큰 어려움 없이 무난하게 잘 버텨냈겠거니 단정했다. L은 모두가 알고 있는 최고 대학에 진학했다.
L과 같은 중학교, 고등학교 동창이라 해도 친분을 쌓던 관계가 아니었으므로 L에 대한 소식을 듣기는 어려웠다. 나중에 한참 시간이 지나 먹고사는 문제로 정신이 없던 때에 그를 보았다. 당시에 ‘나는 가수다’라는 프로그램이 한창 인기를 끌고 있었다. 가수의 도전 곡을 리메이크한 작곡가로 L의 인터뷰가 짤막하게 나왔다. 얼굴은 많이 변했지만 그 눈매만은 기억났다. 신기하기도 했고 그간 L의 시간은 어땠을까 궁금했다.
L은 대학 진학 후에 대중음악으로 진로를 변경했다. 최고 대학에 진학했으니 나름대로 대접받고 공부했겠거니 싶었다. 그러나 실상은 정반대였다. L은 밑바닥부터 다시 시작했다. 처음에 L은 녹음실에 들어가 허드렛일을 시작했다. 대중음악을 익히기 위해 CD 삼천 장을 들으며 수록된 곡의 음을 하나씩 하나씩 따오는 연습을 했다. CD 한 장에 열 곡이 수록된 것으로 가정해도 그 곡 수가 삼만 곡이 될 것이고 그걸 하나씩 하나씩 음을 따는 작업을 아니 노력을 했던 것이다. L은 우연한 기회에 공석이 된 어느 가수의 건반 세션맨으로도 참여했었다. 그 뒤로 L은 학교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유학 갔다. 거기서 L은 영화 음악을 전공하고 국내로 돌아와 작곡 활동도 하고 유명 가수의 공연 감독도 했다. 대학에서 실용음악학과 학장도 지냈다. L은 엄친아가 분명했다. 그러나 거저 얻은 이름은 아니었다.
S는 과거에 묻혀 지냈고 L은 앞으로 나아갔다. 아직 누구의 삶이 모범답안일지 판가름할 수 없다. 아직 진행 중인 삶을 살고 있어서다. 미소를 지을지 한숨을 내 쉴지는 본인에게 남은 몫이다. 후회해도 내 인생 뿌듯해도 내 인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