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舊) 한말 시대 경성(지금의 서울)은 상수도 시설이 열악해 식수로 사용해야 하는 물은 길어다 쓰거나 대놓고 써야 했다. 이 물을 대놓고 쓰는 경우 물장수들이 이른 새벽에 각 집마다 물을 대어 주었다. 이 물장수 중에는 함경남도 동부 북청 출신들이 많아 이들을 가리켜 ‘북청물장수’라 했다.
근현대사의 사회생활을 엿볼 때 그네들의 사료(史料)적 위치와 가치는 어느 정도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오래된 코미디 프로그램이었던 ‘유머일번지’에도 이 북청물장수를 소재로 한 코너가 있었을 정도였다.
유머일번지의 한 코너였던 ‘북청물장수’를 큰 틀에서 보자면 로맨스 코미디로 볼 수 있다. 당시 개그맨 이봉원과 장두석 지금은 고인이 된 조금산 그리고 임미숙과 이경애가 극의 주연이었다. 물장수인 이봉원과 장두석 그리고 갑부(甲富)였던 조금산은 새침한 마을 처녀 임미숙의 마음을 얻기 위해 옥신각신했고 어리숙한 이경애는 조금산의 마음을 얻기 위해 항상 그의 뒤만 졸졸 따라다니는 역할로 설정되었다.
시작은 거의 늘 이봉원이 물지게를 지고 나타나 “물이야요, 물.”하고 외치는 장면으로 시작해 매주 갖가지 에피소드를 전개했다. 코너는 많은 인기를 얻었고 유행어도 있었다. ‘응답하라 1988’에서 정환이 아버지 성균이 늘 마주치는 사람마다 오른팔을 치켜들며 “어이구, ~~ 사장, 반갑구만, 반가워요.”하며 외쳤던 대사도 이 북청물장수의 대표 유행어였다. 그러고 보면 어렸을 때 애 어른 할 것 없이 만났다 하면 장난스레 따라 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프로그램의 한 코너에 불과한 짤막한 이 에피소드들은 일 년여 정도 방영됐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야기의 큰 흐름은 임미숙을 두고 장두석과 이봉원이 늘 티격태격했고 조금산의 경우 이경애를 떨쳐 내려고 아등바등한 모습이 재미를 더했다. 이 에피소드들은 코너 중반에 다다르면서 이봉원과 임미숙이 연인으로, 조금산의 경우 이경애가 그의 아이를 임신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연인이 되는 단계에 이르렀다. 장두석만이 닭 쫓던 개꼴이 되고 말았다. 이봉원과 임미숙이 연인에서 부부로 발전하며 대단원의 막이 끝나간다 싶을 때 갑자기 일 터졌다. 사이렌이 울리며 누군가 크게 소리쳤다.
“전쟁이다! 전쟁이 났다.!”
6. 25였다. 해당 코너는 결말 없이 그렇게 끝났다. 요즘 식으로 시즌 1이 끝난 셈이었다. 다음 주, 코너는 계속 이어졌고 제목도 변함없이 북청물장수였지만 더 이상 물장수는 보이지 아니했다.
피난민들이 얽히고설킨 난전(亂廛) 바닥에 한 남자가 웃옷 주머니에 양손을 집어넣은 채 성큼성큼 큰 발걸음으로 걸어왔다. 그리고 그의 뒤를 따라 한 여인이 남루한 복장으로 기가 죽은 채 리어카를 끌고 들어왔다. 그녀 옆에는 아이도 하나 있었다. 남자는 장두석이었고 여자는 임미숙이었다. 그리고 극 중의 아이는 이들의 아들이었다. 둘은 가정을 이루었고 번데기 장사를 하고 있었다. 남자는 그때나 지금이나 허세가 많았고 새침한 처녀였던 그녀는 남자의 눈치만 보고 늘 주눅 들어 있는 여자가 되었다.
갑부였던 조금산은 이제 갑부가 아니었다. 전쟁이 터지면서 그는 남의 음식이나 훔쳐먹는 거지가 되어 있었고 그의 곁에는 이경애가 그의 딸로 나와 둘은 시장 바닥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어떻게 먹을 것을 훔쳐 먹을까 기회만 노리는 사람들이 되었다.
같은 장소에 있으면서도 서로 마주칠 일이 없던 때에 한 남자가 다리를 절며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이봉원이었다. 물지게의 물통을 쥐던 그 손으로 티(T) 자형 막대에 검은 고무줄을 치렁치렁 걸친 채 지팡이 삼아 의지하며 “고무줄, 고무줄이야요, 고무줄, 고무줄.” 외치고 있었다.
그렇게 코너는 다시 시작됐다. 같은 시장 바닥에 있으면서도 한동안 이들은 마주치지 못한 채 각각의 에피소드만 이어졌다.
그러던 중 우연히 장두석과 조금산이 마주하게 됐다. 변하지 아니했던 것은 둘의 인사법이었다. 이봉원의 행방을 묻던 장두석에게 조금산은 이봉원 피난열차 지붕에서 품에 안고 있던 옷 보따리를 떨어트려 이를 잡으려다 열차 지붕에서 떨어진 것만 봤고 그 생사는 알지 못한다고 했다. 이후 조금산은 장두석의 집에 초대되어 저녁을 얻어먹게 됐을 때 임미숙이 장두석의 아내가 된 것을 보게 됐다. 임미숙이 조용한 목소리로 이봉원의 행방을 물었을 때 그는 둘의 관계를 의식해 이봉원은 피난 내려오면서 그냥 죽었다고 했다. 임미숙은 그저 말없이 장두석의 품에서 눈물을 훔쳤다.
시간은 또 흘러갔다. 난전 바닥도 변함없이 흘러갔다. 어떻게 다음 이야기가 전개되었는지 잘은 기억나지 않지만 이봉원은 그렇게 시장을 떠돌며 지내다 조금산을 만나게 됐고 그렇게 다음 수순으로 장두석을 만나게 됐다. 전후사정을 알 수 없던 이봉원은 헤어진 옛 물장수 동료가 반갑기만 했고 그 길로 장두석의 집으로 향했다. 임미숙이 처(妻)로 있는 장두석의 집으로 갔다.
임미숙을 마주한 이봉원은 억장이 무너졌다. 사랑했던 연인이었고 곧 그의 아내가 될 여자가 경쟁자의 아내가 된 것도 모자라 이제 그의 애까지 있었으니 처음엔 말문이 막히고 다음엔 안절부절못하다 급기야 오열하며 몸을 데굴데굴 굴렀다. 누구도 말릴 수 없었다. 쓰린 표정만 지은 채 임미숙은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코미디언 특유의 동작과 표현으로 약간의 희극적 요소를 집어넣었지만 누가 그것을 웃으면서 볼 수 있었을까....
여기까지가 내가 기억하는 북청물장수의 마지막이었다. 그 이후 다른 에피소드가 더 있는지 모르겠지만 기억나는 북청물장수의 끝은 거기까지였다.
단편적인 요소로만 이루어진 코너들 사이에서 보기 드문 서사가 들어간 코너가 유머일번지에는 여러 편이 있었다. 그러나 북청물장수 같은 서사는 그때나 지금이나 드물다. 그때는 안방에서만 시청했던 코미디로 상황극이 주를 이루던 시절이었다. 지금은 그 형식을 벗어나 공개 코미디로 전환됐다. 그리고 관람만 하던 시청자가 이제 코너와 동참하는 시대가 됐다. 안정된 연기력보다 순발력과 애드립이 코미디언의 진가를 발휘하는 시대가 됐다.
한동안 시청률 저조로 폐지된 공개 코미디가 다시 방영되면서 이제 다시 자리를 되찾았다. 개그콘서트다. ‘챗플릭스’라는 코너가 있다. 다양한 소재로 코너를 이어가지만 기본 대본을 바탕으로 순간순간 관객들이 문자로 전송한 애드립으로 코너를 이어간다. 그리고 다시 연기자들은 그 애드립에 맞춰 다시 애드립으로 상황을 이어간다. 나이가 들어서인지 코드가 맞지 아니해서 그런지 어느 경우엔 웃음 포인트를 놓친 채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다.
예전엔 할머니나 엄마나 모두 같이 웃던 때가 있었다. 간혹 “저게 뭐 그렇게 재밌냐?”하고 반문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같이 웃던 때가 더 많았다. 지금은 동년배끼리도 같은 프로그램을 보면서 같이 웃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