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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은 시인의 “그 꽃”

마음을 내려놓을 때 보이는 꽃

by 박바로가

그 꽃

고은 시인


내려 올 때

보았네

올라 갈 때

못 본

그 꽃


내려 올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못 본 그꽃/라는 4, 3, 4, 4 음보를 지닌 한 행으로 된 시이다. 그런데 이미 시인이 배열한 시어를 살펴봤을 때도 알 수 있듯이, 내려올 때와 올라갈때의 차이점에 주목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간단히 추려 말해보면, 시적 화자는 내려 올 때 무엇인가를 보았고 그 꽃은 올라갈 때는 전혀 있는지 조차 몰랐던 꽃이라고 고백한다. 흔희들 사람들은 올라갈 때는 빨리 올라가느라 보지 못한 것을 내려올 때 천천히 내려오면서 보게 되었다고 해석한다. 그 해석은 틀린 것은 결코 아니다. 하지만 한가지 놓친 사실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아무리 천천히 내려와도 보이지 않는 것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눈먼 봉사‘라고 했던가? “업은 아기 삼면 찾는다”라고 했던가? 원래 마음에서 찾지 못한 것은 바로 옆에 있어도 찾지 못한다. 아무리 좋은 것이 있어도 내 마음이 그것을 보지 못할 때는 아무것도 찾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한다. 그래서 고은 시인이 시적화자를 통해 말하려고 했던 “그 꽃”은 마치 벌거벗은 임금님의 옷처럼 모두가 볼 수 있지만 그것을 진실로 보고 말할 수 있는 이는 없는 허상에 가려진 진실이라고 할 수 있다.

아무리 ‘꽃’이라고 하지만 ”그 꽃“이라고 관형사 ”그“를 넣은 것도 고은 시인의 의도라고 할 수 있다. 그냥 꽃이 아니고 거기에 존재하는 ”그 꽃“이라는 것이다. 존재론적인 의미에 봐서도 이미 거기에 있었지만 ”존재자“로서 존재하지 못한 것은 내가 미처 그 꽃을 “존재”로서 알아채지 못했던 탓에 있다. 김춘수의 “꽃”에서도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고은 시인의 시적 화자의 꽃이 “그 꽃”으로서 의미가 화자에게 더욱 강하게 다가 오는 것이다. 비록 “존재자”로서의 본질이 그 안에 있어도 실존은 시적 화자의 오감에 의해 주관적으로 인지되는 것이기 때문에 시각화에 의해 이 점을 분명히 강조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런 시각의 차이를 불러오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시적 화자의 마음상태의 변화에서 우러나온다. 올라 갈때는 정상을 보고자 하는 마음으로 바쁘고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 발 아래를 쳐다보기 보다는 눈의 초점은 정상을 향해 위쪽을 바라보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내려 올 때는 발뿌리가 채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비록 정상을 다녀왔다는 만족스런 마음에 조금 천천히 내려오더라도 말이다. 이런 때는 천천히 가는 지혜가 필요하다. 마른 흙이나 젖은 흙에 미끄러 쓸려 내려갈 수 도 있다. 낙엽 역시 조심해야 한다. 무엇하나 내려온다고 쉬이 행동할 수 없다. 내려올 때는 마음을 내려놓는 자세가 필요하다. 올라갈 때의 세찬 발걸음은 내려올 때 조심스런 느린 걸음으로 바뀌어야 한다. 특히 이럴 때 허둥지둥 내려가면 안된다. 그렇기에 내려 올 때는 올라갈 때의 마음을 내려놓을 필요가 있다.

그래서 고은 시인이 “내려갈 때”라는 말을 먼저 강조하며 “올라 갈때” “못 본” “그 꽃”이라고 시어를 배열한 것은 과히 그의 예술성과 삶의 철학을 느끼게 해준다고 말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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