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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구 시인의 "사평 역에서"

침묵하는 아픔에 관하여

by 박바로가

사평역에서 /곽재구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 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 시린 유리창마다

톱밥 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름처럼 몇은 졸고 (5)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 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 두고 (10)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름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15)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 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 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20)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 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25)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 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총 27행으로 되어 있는 이 시를 읽었을 때, 여러가지로 해석이 가능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우선 1981년 중앙일보에 당선된 시의 내용으로 볼 때는 1980년 광주 시민 항쟁이 있었던 것을 염두해서 쓴 시라는 생각이 든다. 특히, 예전 80년대의 분위기가 나는 "톱밥 난로"라는 단어를 통해서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그 관점에서 글을 읽는다면 1980년 사건에 대해 침묵하면서 삶을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의 비겁함과 극악무도한 시대에 살아남아야 하는 삶의 무거움에 대해서 말한 것이리라.

만약 시대적인 사건을 떠나서 이 시를 본다면 녹록하지 않은 삶의 무거움에 대해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덮히기를 바라는 무언가를 마음에 묻고 살아가는 사람의 아픔에 대해서도 표현한 것으로 보여진다.

1행에서 8행까지에서 나타난 시간은 막차를 기다리는 늦은 밤 시간이다. 장소는 사평역이다. 지금은 9호선이 지나다니고 있는 사평역은 변두리지역에 있는 역이다. 좀처럼 오지 않는 막차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톱밥 난로를 쬐며 몇몇은 졸고 몇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있다. 시적화자는 이 시점에 순간 그리웠던 과거를 회상하며 한 줌의 톱밥을 난로의 불빛 속에 던지는 행위를 한다.

9행에서 16행까지에서 시적화자는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한" 주변 사람들은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라고 주변을 살피듯 설명한다. 기차를 타고 귀향하는 사람들의 침묵처럼 내면 의식으로 들어간 사람들의 마음은 무거운 삶에 취한 듯, 모두들 말이 없어져 버린 채로 자신 만의 위안이 되는 행위를 할 뿐이지만 결국은 모두 같이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만만치 않은 삶의 무게가 그들의 입에 무거운 결박을 달듯, 그들의 입을 떼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17행에서 21행까지에서 입을 꾹 다문 사람들은 모두 저마다의 사연을 가지고 있는 듯 하게 보인다. 눈까지 오는 추운 어느 겨울 밤, 사평역에서 늦은 시간에 대기실에 있던 모두는 바쁘게 돌아가는 일상을 내려 놓고 뒤에서 멀리 들려오는 기침 소리를 뒤로 한채, 쓴 담배 연기냄새를 맡으면서 눈꽃송이가 내려오는 소리를 들을 만큼 쥐죽을 만큼 조용한 고요를 같이 공유하고 있다. 어디 누구 하나가 입을 열면 개인의 역사가 열릴만 하건만. 그들은 입을 여는 대신, 침묵으로 서로의 삶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22행에서 마지막 행까지 다시 시적화자로 이야기가 돌아온다. "낯설음"과 "뻐아픔"도 모두 그의 몫으로 남겨진 삶의 무게의 흔적이지만 계속 내리는 눈꽃으로 어딘가에서 덮혀지고 있다. 눈이 녹으면 다시 드러날 "낯설음"과 "뼈아픔"이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인생이 밤 열차를 타고 같이 흘러가듯 사라지는 과정에서도 평생의 트라우마처럼 드리워진 삶의 어려움을 기억하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톱밥을 난로에 넣어 불을 피웠듯이, 오늘 흘린 "한 줌의 눈물"을 인생이라는 난로에 던지면서 살아갈 것이라고 담담히 서술한다.

전반적으로 모든 행에서 느껴지는 모두의 침묵은 침묵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그들은 암묵적으로 자신들의 침묵으로 대합실을 가득 채우면서, 눈꽃이 내리는 한 밤중에 눈을 뚫고 한 밤을 달리는 밤 열차처럼 인생이 끝나는 종착지점까지 계속 달려야 함을 진지하게 인지하고 있다. 암울한 시대를 살아가는 인생도 그렇고, 좋은 시대를 살아가는 인생도 그렇다. 인생에 호시절이 있다고 하지만 어디 호락호락한 인생이 있겠는가? 그 인생의 무게를 견디게 해주는 침묵은 삶에 충분히 저항하지 않는다고 비겁하다고 비난받을 수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침묵으로 자기수행을 할 수밖에 없는 자신의 삶의 무거움을 버티는 인내와 저력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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