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련한 추억의 가장자리
세월이 가면 / 박인환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고 옛날은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취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1955년작인 이 시는 상실의 아픔을 체념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시를 작성한 시기적으로 봤을 때 6.25 전쟁후에 상실한 어느 누군가를 추모하는 구성도 눈에 띈다. 시대적으로만 메여서 보지 않는다면 인연이었던 사람, 소중했던 사람을 잃고 마음을 추스리지 못하는 애절함도 강하게 느껴진다.
1연에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녀)의 "눈동자 입술"이라는 그의 존재감은 여전히 나의 가슴속에 존재한다. 이름으로 그 사람을 규정하기 보다는 그의 존재감 자체가 내 마음에 살아 있다는 말이다. 이름은 사회적인 약속이지만 그 사람의 생물학적인 존재감은 어느 누구와도 같지 않기 때문에 나의 기억은 유일하고 매우 소중한 경험인 것이다.
2연에서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시적 화자인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라고 고백한다. 우리는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시적 화자와 그에게는 매우 특별한 경험이 있었다는 추측을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특별한 밤은 결코 쉽게 잊혀지기 어려운 밤인 것이다. 그 만큼 특별했던 밤, 같은 시간을 보낸 두 사람의 유대는 남다르다고 여길 수 있다.
3연에서 "사랑은 가고 옛날은 남는 것"이라는 말로 그와의 인연이 끝났음을 추측할 수 있다. 특히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사라지듯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라는 말에서 사랑의 허무함과 무상함을 느낄 수가 있다.
그러나 4연에서 다시 1연의 "이름은 잊었지만"이라는 말로 "그 눈동자 입술"이라는 그의 특유한 존재감은 "내 가슴에 있네"라고 말함으로써 사랑이 모두 허무하게 사라져버린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헌데, 씁쓸한 것은 이제는 열정적으로 불타는 마음으로 있는 것이 아니고 "서늘한 가슴에 있네"로 끝나는 것이다.
추억은 퇴색한다고 했던가! 그를 그리워하고 사랑했던 마음도 시간이 흐르면서 열정이 서늘한 추억으로 남게 된다. 그럼에도 마음은 활기와 윤기를 잃었을 지언정 여전히 추억하고 있는 것이다. 이 얼마나 아련한 사랑의 추억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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