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없다?
천만가지 / 로나 박
그대로 인해 생겨난 내 마음은
천만가지 태어난 연두 잎사귀로
그대의 숨결만으로도 마구 흔들리네
그대를 좋아하는 시적 화자는 자신의 마음이 천만의 가지에 돋아난 연두 잎사귀라고 한다. 그런데 그 잎사귀는 그대로 인해 태어났다고 하며 하물며 그대의 숨결만으로도 그 작은 숨결만으로도 파르르 떠는 작은 잎이라고 한다.
이렇게 사랑스러운 잎사귀를 봤는가? 하지만 이런 잎사귀를 가진 천만 개의 가지를 가진 나무의 입장은 어떠할까?
그대라는 대상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고 심지어 떨면서 자신의 감정을 주체 못 하고 숨기지 못하는 잎사귀 때문에 고통스러울 것이다. 본디 나무는 바람이 불 때만 잎사귀를 나붓낀다. 그런데 이 주책없는 잎사귀들이 시도 때도 없이 흐느끼듯 떨어대니 나무는 자못 자신의 신경체계의 말단부가 걱정스럽다.
그들은 광합성도 해서 양분도 만들어 내야 하고, 나무 내 물도 이동시켜야 하고, 수분 조절도 해야 한다. 그런데 아무 때나 떨고 있는 잎사귀 때문에 나무는 과연 자신이 다가올 겨울 전에 충분히 영양분을 잘 비축해 추운 겨울을 잘 날 수 있을지 걱정이다.
그래서 뿌리처럼 나무의 말초신경인 잎사귀 때문에 나무는 잎사귀의 반응이 몹시 우려되고 그대의 숨결조차 반응하는 그들의 섬세한 감성이 지나친 열정이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 결국 감정의 과다인 열정은 나뭇잎에게 대상이 사랑스럽기보다는 고통스러울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나무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도 어떨까? 뭐든 과하면 힘들듯 사랑의 열정 역시 사랑을 고통스럽게 만든다. 왜 그럴까?
그것은 사랑이 없기 때문이다. 롤랑 바르뜨도 그의 책, “사랑의 단상”에서 그렇다고 밝혔다. 또한 우리나라 작가 이광수도 유정과 무정이라는 글을 통해 고민했었다. 무엇보다도 이 사랑의 존재유무 문제는 라깡의 말을 빌어 시적으로 표현하면 훨씬 간결해진다.
사랑이라는 원관념과 사랑의 표현물인 보조관념을 생각해 보면 된다. 여러 시인이 보조관념으로 원관념을 설명해도 그 누구도 사랑의 본질을 설명하지 못한다. 그냥 코끼리를 부위별로만 만져보고 전체의 모습을 말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혹자는 사랑을 등가적 가치의 교환이라고 생각하며 그걸 사랑으로 간주하고 남녀의 결혼을 성사시키고 만족한다. 물론 결혼은 인륜지대사이기 때문에 중요하다. 그러나 서로 성향이 맞고 존중하고 아끼기 때문에 결혼하기보다는 그 사람의 가치가 결혼에 중차대한 결정요소로 작용한다. 설령 둘이 몹시 사랑한다고 생각해도 자신의 이미지를 투영한 사랑인 것이다.
그래서일까? 에릭 프롬은 “사랑”이라는 책을 쓰는 대신 “사랑의 기술”이라는 제목을 사용했다. 어쩌면 그 편이 더 솔직하기 때문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