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째 여정 – 얼음의 성채와 겨울 여왕
〈세 번째 여정 – 얼음의 성채와 겨울 여왕〉
서늘한 바람의 부름
아슈란을 뒤로한 지 하루째 되는 날, 길 위에는 한기가 서리기 시작했다.
붉은 모래와 바위는 어느새 회색 자갈로 바뀌었고, 땅 위에는 얇은 서리가 낮은 풀잎에 매달려 있었다. 공기 속에는 차가운 금속 향이 배어 있었고, 숨을 내쉴 때마다 입김이 흰 연기처럼 흩어졌다.
리아는 망토를 여몄지만, 바람은 틈새를 비집고 들어와 뼛속까지 파고들었다.
“이건… 불의 땅에서 나오자마자 바로 느껴지는 온도가 아니네.”
그녀가 중얼거리자, 카일은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희미한 푸른빛이 수평선을 따라 번지고 있었다.
“저기야. 얼음의 성채, 프리마 실렌시아. 겨울 여왕의 궁전이지.”
그 이름을 말할 때, 카일의 목소리는 묘하게 낮아졌다. 리아는 그 변화가 불길함인지 경계심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 안에는 확실히 조심스러운 기운이 배어 있었다.
끝없는 빙원
나아갈수록 눈발이 굵어졌다. 처음에는 가벼운 가루처럼 바람에 흩날리던 눈이, 이내 길 위를 덮어 발자국조차 바로 지워버렸다. 하늘은 구름과 눈발이 뒤섞여 흐릿하게 빛났고, 그 아래로 끝없는 빙원이 펼쳐졌다.
얼음판은 마치 유리처럼 매끈했지만, 그 속에는 오래전 얼어붙은 파도와 소용돌이 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발밑에서는 ‘찌익’ 하고 얼음이 미세하게 갈라지는 소리가 났고, 그 소리가 고요한 들판에서 유난히 크게 울렸다.
멀리서 하얀 벽처럼 솟아오른 성채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벽은 단순한 돌이 아니라, 수백 년 동안 눈과 얼음이 쌓이고 굳어져 만들어진 것이었다. 표면에는 바람이 만든 곡선이 흐르며, 얼음 속에는 별빛처럼 반짝이는 서리가 박혀 있었다.
“와… 정말 얼음으로 만든 성이네.”
리아가 숨을 죽이며 말하자, 카일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저 벽 뒤에는, 바람조차 숨을 멈추게 만드는 힘이 있어.”
얼음의 문지기
성문 앞에는 두 개의 거대한 석상 같은 형체가 서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그것이 석상이 아니라 얼어붙은 생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흰 늑대의 형상을 한 이 수호자는 크기가 수레만 했고, 눈동자 대신 푸른 수정이 박혀 있었다.
그 수정이 희미하게 빛나자, 차가운 목소리가 공기 속에서 울려 퍼졌다.
“여기는 겨울 여왕의 성채. 허락받지 못한 자는 한 발자국도 들어갈 수 없다.”
카일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우리는 여왕을 뵈러 왔다. 세상의 균형을 지키기 위해, 얼음의 심장을 찾는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수정 늑대들의 눈에서 서리가 흩날렸다.
“그 심장은 여왕의 것이다. 그리고 여왕은 그 누구도 시험 없이 맞이하지 않는다.”
눈발이 세차게 휘몰아치더니, 성문이 천천히 열리며 얼음과 바람으로 이루어진 복도가 모습을 드러냈다.
겨울 여왕의 궁전
안으로 들어서자, 바깥보다도 더 깊은 한기가 폐 속까지 스며들었다. 벽과 천장은 투명한 얼음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그 안에는 눈송이들이 시간에 갇힌 듯 공중에서 빛나고 있었다. 천장 높은 곳에서 매달린 얼음 결정들이 바람이 스칠 때마다 맑은 종소리를 냈다.
그리고 궁전의 중앙, 얼음 계단 위에 겨울 여왕이 앉아 있었다.
그녀는 눈처럼 새하얀 머리칼을 길게 늘어뜨렸고, 눈동자는 서리꽃처럼 푸르고 차가웠다. 드레스는 은빛과 옅은 하늘색이 층층이 겹쳐져 있었으며, 움직일 때마다 마치 오로라처럼 색이 번졌다.
“불의 심장을 가진 자여, 그리고 그와 함께 온 인간이여.”
그녀의 목소리는 잔잔했지만, 그 안에 담긴 기운은 얼음처럼 날카로웠다.
“이곳의 심장은 그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너희가 진정 이 힘을 감당할 수 있는지, 시험이 필요하다.”
눈보라의 시험
여왕이 손끝을 스치자, 궁전 바닥이 갈라지고 사방에서 눈보라가 솟구쳤다. 바람은 칼날처럼 예리했고, 눈송이들은 작은 얼음 파편이 되어 피부를 스쳤다. 발밑의 얼음은 미끄러워 발을 디딜 때마다 중심을 잃을 뻔했다.
“리아!” 카일이 외쳤다.
그 순간, 눈보라 속에서 서리로 만들어진 짐승들이 나타났다. 늑대, 곰, 그리고 날개 달린 괴조가 한꺼번에 달려들었다. 카일은 불길을 터뜨려 길을 열었지만, 불꽃은 눈과 얼음에 부딪혀 금세 사라졌다.
리아는 불의 심장을 움켜쥐었다. 뜨거운 열기가 손바닥을 태웠지만, 그 온기가 눈보라 속에서 길을 만들었다. 그녀는 카일과 함께 중앙의 얼음 기둥을 향해 달려갔다.
얼음의 심장
기둥 속에는 수정처럼 맑은 심장이 박혀 있었고, 그 표면에는 눈송이 모양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리아가 손을 뻗자, 손끝이 얼어붙는 듯한 고통이 스쳤다. 하지만 그 차가움 속에서, 불의 심장과는 다른 깊고 고요한 맥박이 전해졌다.
순간, 그녀의 머릿속에는 얼음 왕국의 기억이 흘러들었다. 끝없는 겨울 속에서도, 생명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여왕의 모습. 그리고 차가운 얼굴 뒤에 숨겨진 외로운 결의가 느껴졌다.
눈보라가 멎자, 겨울 여왕이 다가왔다.
“네 마음에는 두 가지 불꽃이 있다. 뜨겁지만 사나운 불, 그리고 차갑지만 견고한 불. 그 둘이 함께라면… 어쩌면 세상을 지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심장을 리아의 손에 쥐여주었다.
“그러나 기억하라. 얼음은 불을 억누르기도 하고, 불은 얼음을 녹이기도 한다. 균형을 잃는 순간, 너는 모든 것을 잃을 것이다.”
다음 여정의 그림자
궁전을 나설 때, 하늘 한쪽에 붉은 석양과 함께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바람은 차가웠지만, 그 속에 불길한 냄새가 섞여 있었다.
카일이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다음은… 그림자의 계곡이군.”
리아는 심장을 품에 안은 채, 그 끝을 알 수 없는 여정의 무게를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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