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라는 어려운 명령 앞에서

by 박지현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요한일서 4:7-8)


새해를 맞아 펼친 성경책 앞에서 한참을 머뭇거렸다. 나는 모태신앙이다. 모태신앙이라고 해서 신앙이 늘 신실한 것은 아니지만, 삶의 아득한 문턱에 설 때면 본능적으로 기도하며 하나님을 의지하려 한다. 2026년의 시작 또한 막막한 마음에 기도와 말씀으로 열고 싶었다.


그러나 위 구절을 마주한 순간,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는 요청이 차마 삼켜지지 못한 채 목구멍에 걸려 있었다. “나는 과연 서로를 사랑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이 소화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가족이나 연인처럼 곁에 있는 이들을 향한 사랑을 넘어, 내가 모르는 타인을 위해서도 기꺼이 사랑을 내어줄 수 있는 사람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돌이켜보면 나의 지난 궤적은 사랑보다는 분노로 점철되어 있었다. 추적단불꽃 활동을 하며 디지털 성범죄 근절을 위해 달려온 시간들, 그 치열했던 동력은 가해자들을 향한 뜨거운 분노였다. 무언가를 철폐하고 근절해야 한다는 일념에 혈안이 되었던 날들이었다. 정치를 시작하면서도 세상을 바꿔내야 한다는 각오와 다짐이 앞섰을 뿐, ‘사랑’이라는 어렵고 입체적인 단어는 그 안에 없었던 것 같다.


그렇다면 내 삶은 정말 사랑과는 무관한 궤적이었을까. 분노로만 설명할 수 있는 시간이었을까. 그럼에도 나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리고 정치로 세상을 바꾸려는 한 사람으로서 나는 분노보다 사랑을 이야기하는 사람이고 싶다. 곰곰이 고민해 본다. 내 활동의 심장부였던 그 분노 아래에는, 피해자의 존엄을 지키고 싶어 했던 아주 작고 연약한 사랑의 씨앗이 들어 있지는 않았을까 하고 말이다.


하지만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이 이토록 공허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신앙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폭력을 너무 많이 보아왔기 때문이다. 물론 하나님을 믿는다는 이들이 모두 서로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잘 안다. 오히려 믿음이 있다는 자가 어떻게 저런 말과 행동을 할 수 있을까 싶은 이들을, 나는 내 페이스북 댓글 창에서도 수없이 목격해 왔다. 예수님의 자녀라 자처하면서도 타인의 심장에 비수를 꽂고, 비난을 위한 비난과 조롱을 서슴지 않는 모습들 앞에서 언어는 종종 가장 잔인한 무기가 된다.


언어폭력이 가장 잔인하게 드러나는 순간은, 특히나 사회적 참사 앞에서다. 얼마 전 무안공항 제주항공 참사 1주기를 맞이하며 마음이 더욱 무거웠다. 지난해 이맘때쯤 무안공항에서 봉사하며 마주했던 유가족분들의 황망한 얼굴이 지금도 시리게 남아 있다. 예고 없이 찾아온 이별 앞에서 무너져 내린 그분들의 슬픔을 감히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그 아픔을 충분히 애도하기도 전에, 또 다른 칼날을 들이댔다.


세월호와 이태원 때도 그러했듯, 무안공항 참사 이후에도 유가족을 향한 잔인한 조롱 섞인 댓글들을 보게 됐다. 그 문장들을 읽으며 나는 댓글 작성자에 대해 인간으로서의 신뢰가 무너지는 감정을 느꼈다. 최소한의 인간적 예의조차 실종된 그 공간에서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는 구절은 현실과 동떨어진 아득한 메아리처럼 들렸다.


여기서 나는 다시 고통스러운 질문이 머리에 남는다. 사랑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우리는 이런 사람들까지 사랑해야 하는가. 적어도 내가 이해하는 하나님의 사랑은 악을 방관하는 무조건적인 용서가 아니다. 요한일서가 말하는 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것이지, 타인의 존엄을 짓밟는 불의와 손잡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때로 사랑은 누군가를 품어주는 온기이지만, 때로는 소중한 가치를 지키기 위해 단호하게 매를 드는 공의일 수밖에 없다. 유가족의 눈물을 조롱하는 이들에게 엄중한 책임을 묻고, 아픈 이들의 마음에 깊이 공명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이 사회가 희생자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사회적 사랑의 형태일 것이다. 사랑의 다른 말은,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고 그 고통을 가하는 자들을 향해 단호하게 “아니요”라고 말하는 용기라고 말하고 싶다.


사랑하기 때문에 침묵하지 않고, 사랑하기 때문에 더 치열하게 안전한 세상을 요구하고 싶다. 나 또한 내가 발을 딛고 서 있는 모든 곳에서, 더 이상 흔들리지 않는 뿌리 깊은 안정감을 느낄 수 있기를 소망한다.


니체는 일평생 “나는 어떻게 이 삶을 사랑할 것인가?”를 고민했다고 한다. 나 또한 2026년의 문턱에서 비슷한 질문을 이어가려 한다. “나는 어떻게 서로를 사랑할 것인가, 그리고 그 마음은 과연 이 세상을 어떻게 바꿔낼 것인가.” 어렵고 막막하지만, 기꺼이 그 길을 걸어보고 싶다. 분노가 아닌, 공의로운 사랑을 동력 삼아.

작가의 이전글2026년에 내가 원하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