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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미래 Jun 09. 2022

하나님이 맺어준 인연

에피소드 2-나는 엄마였다

 어느 날이었다. 그날은 일요일이었는데 어릴 적 다녔던 기억 때문인지 교회가 갑자기 가고 싶어졌다. 평소에 학교에서 여의도 순복음교회를 아주 열심히 다니는 선생님이 매일 교회에 다니라고 전도를 하였지만 별로 교회에 가고 싶은 생각이 없었는데 참 이상한 일이었다.

 다음날 학교에 가서 순복음교회 전도 신문을 들고 오신 선생님께

 “선생님, 저 어제 집 앞에 있는 교회에 갔었어요.”

 “어머 잘했네. 여의도 순복음교회에서 이번 주부터 성경학교 1기를 시작하는데 같이 가보지 않을래요?”

 성경책과 찬송가를 챙겨주시면서 권하시는 선생님의 권유를 거절할 수가 없어서 1주일에 두 번씩 여의도 순복음교회에 성경 공부를 하러 가기로 하였다.     


 처음으로 가본 순복음교회는 너무 커서 무척 놀랐다. 성경 공부하러 처음 간 날 양복 입은 아저씨 같은 사람이 옆자리에 앉았었는데 친절하게 성경도 찾아주고 모르는 것도 가르쳐 주었다. 내가 대학생인 줄 알았다고 나중에 말해 주었다. 이렇게 석 달 동안 성경 공부를 하러 다녔고 그 아저씨는 내 옆자리나 내 주위에 앉아서 가끔 음료수도 사다 주곤 하였다. 그리고 본인은 금요일마다 청년부 철야 예배에 꼭 참석한다고 한번 와 보라고 하였다. 참석해보니 손뼉 치며 성령이 넘치는 찬양과 방언 등은 신앙심이 별로 없었던 나로서는 적응이 잘 안 되어 철야 기도회는 나가지 않았었다. 금요 철야가 싫으면 청년회에 들어오면 어떻겠냐며 하였다. 청년회에서 일요일에 교도소 전도도 몇 번 나갔었고 야유회도 다녀왔다. 이렇게 시작해서 우리는 친해졌고 5년의 나이 차이와 부모님의 반대도 극복하고 88 올림픽을 기념하는 의미로 1982년 8월 8일에 약혼식을 하였고, 이듬해 4월 5일 식목일에 ' 인생을 심는다’는 의미로 결혼을 하여 제주도로 신혼여행을 다녀왔다. 나는 신혼여행 때 처음으로 비행기를 타 보았다. 

    

 우리가 결혼할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사우디아라비아 등 중동의 건설 현장으로 일하러 나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건설 회사에 다니던 남편도 결혼하고 5개월 후인 9월에 사우디아라비아로 가게 되었다. 신혼의 꿈에 젖어있을 때 남편이 해외로 간다고 하였을 때 그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남편이 중동으로 떠나고 11월에 친정아버지께서 갑자기 세상을 떠나셨다. 그 당시 강릉에 있는 초등학교에 근무하셨는데 봄부터 통증이 좀 있었지만 위염이라고 생각하였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을 중단할 수 없어서 강릉에 있는 병원에 다니시고 약만 복용하셨다. 여름방학을 하여 지인의 소개로 신촌 세브란스 병원에서 검사하였는데 간경화라는 진단이 나왔다. 아마 평소에 술을 좋아하셨던 것이 원인이었던 것 같다. 평소에 ‘우리 공주’하시며 남동생들을 제쳐놓고 나를 얼마나 예뻐하셨는가. 그리고 넉넉한 살림이 아니었는데도 내가 사 달라고 하는 것이면 거절을 못 하시고 다 사주셨던 자상한 아빠셨다.    

  

 남편이 없는 동안 나는 살던 집에서 반지하에 있는 방 두 개짜리 집으로 이사를 하였다. 그 당시 연탄을 피워 난방으로 사용하였는데 연탄 가는 일이 제일 힘들어 불을 꺼뜨려서 주인집 아주머니께서 불을 붙여주시곤 하였다. 집에 전화도 없어서 중동에서 주인집으로 전화를 하면 올라가서 받곤 하였다. 살면서 그때 가장 많은 고생을 한 것 같다. 물론 나뿐만 아니라 그때는 다 그렇게 살았다. 남편이 전화를 너무 자주하여 함께 근무하던 동료들이 

“월급 타서 전화비로 다 쓰겠어.”

라고 할 정도였다고 한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남편도 외국에 나가 있었던 터라 대학생이던 막내 남동생과 대학원에 다니는 큰 남동생과 함께 생활하였다. 남편에게는 거의 매일 편지를 썼고 테이프에 녹음을 하여 보내기도 하였다. 그때의 편지는 지금도 보관하고 있다. 평소에 울보였던 나는 전화를 받을 때마다 눈물이 앞을 가려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남편이 중동에서 3년 정도 근무하다가 귀국하여 벌어 온 돈으로 작은 아파트를 마련하였다. 지금은 아파트값이 정말 비싸 꿈도 꿀 수 없는 일이겠지만 24평 아파트를 사서 작은 아들이 태어날 때까지 살았다. 그 후에 같은 아파트 단지의 조금 큰 평수로 옮겨서 살다가 지금 사는 인천 아파트로 분양을 받아 지금까지 살고 있다.     


 지금 생각해도 하나님이 맺어 준 인연이 아니고서는 우린 만날 수 없는 사이였다고 생각한다. 지금도 남편과 함께 교회를 다니고 같은 곳을 바라보며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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