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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미래 Jun 23. 2022

공붓벌레, 일벌레

학창 시절-직장 생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뺑뺑이(손잡이를 돌리면 번호가 쓰여 있는 은행알 같은 것이 나옴)를 돌려서 나는 여자중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강릉에는 그 당시 여자중학교가 두 학교가 있었는데 한 곳은 공립이고 다른 한 곳은 사립이었다. 나는 사립 중학교에 배치되었다. 1학년은 시험을 치고 반 편성을 하였는데 5반은 공부 잘하는 아이들만 모아놓은 우등반이었다. 아쉽게도 나는 그 반에 못 들어가고 1반이 되었다. 공부 욕심이 많았던 나는 속으로 많이 속상하였지만 겉으로 태연한 척한 것 같다. 특히 옆집에 사는 친구가 우등반이 되어 더 속상했다. 초등학교 6년 동안 한 번도 놓치지 않고 우등상을 탓 던 터라 내가 왜 그 반에 들어가지 못했는지 두고두고 속상하였다.

 ‘어디 두고 보자. 열심히 공부해서 5반 아이들 코를 납작하게 해 주어야지.’     


 1반 담임선생님은 도덕을 맡으신 김상두 선생님이셨는데 꼭 분위기가 목사님 같으셨다. 나는 반장이 되었고 좀 큰 듯한 교복에 단발머리를 하고 10리쯤 되는 길을 버스를 타거나 걸어서 통학하였다. 가을에는 길 양쪽으로 코스모스가 피어 무척 아름다웠는데 코스모스 길 사이를 가방을 메고 달리다가 입학 선물로 받은 만년필을 잃어버려 너무 아까웠다. 옛날에는 최고의 입학 선물이 만년필이었다.


 그 때는 매월 시험을 보았다. 그 당시 외갓집에는 전기가 안 들어왔기 때문에 등잔불을 켜 놓고 공부하다가 졸다가 머리를 그을리기도 하였고, 라디오 ‘별이 빛나는 밤에’를 늦게까지 들으며 열심히 공부하였다. 그 결과  두번째 시험에서 전교 3등을 하여 선생님들을 깜짝 놀라게 하였고, 1학년 학생들도 내가 누군지 무척 궁금해했다. 그때부터 우등반은 아니었지만 학교에서 공부를 잘하는 학생으로 인정을 받았고 중 2, 3학년 때까지도 계속 전교 10등 안에는 들었다.      

 걸어가면서 영어단어 외우기는 기본이었고 성격상 늘 시험 보기 전에는 처음부터 시험 범위까지 완벽하게 공부하였다. 그 결과 고등학교 입학시험에서 전교 2등 차석으로 합격을 하여 1학년 때 장학금을 받기도 하였다. 그때 지방은 고등학교에 시험을 보고 입학하였던 시기이다. 고향이 강릉이라고 하면 드라마‘파리의 연인’에 나온 여자 주인공이 다닌 강릉여고 다녔냐고 물어보는 사람들이 있어 강릉여고를 졸업하지 못한 것이 조금 아쉽다. 실력 때문이 아니라 여중을 졸업하고 같은 재단의 여고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누구나 그렇듯이 고등학교의 목표는 좋은 대학교에 입학하는 거여서 공부를 열심히 하였지만 다른 취미활동도 하였다. 학창 시절에 의욕이 넘치는 학생이었던 것 같다. 돈이 들어가는 걸스카우트를 하고 싶었지만 부모님께 부담을 드리기 싫어서 RCY 청소년 단체에 가입하여 활동하였고, 학교의 국악부에 들어 가야금과 양금을 배워 학교 수선제와 TV‘우리들 세상’에도 출연하였다.

 비 오는 날이면 영어 시간에 우리가 선생님께 팝송을 불러 달라고 조르면 눈을 지그시 감으시고 ‘체인징 파트너, 어느 소녀에게 바친 사랑’ 등을 불러주시던 영어 선생님도 생각난다. 그런 모습이 너무 멋있어 보여 영어 선생님을 좋아했던 것이 첫사랑(짝사랑)이었던 것 같다. 물론 나뿐만 아니라 많은 여학생들이 영어 선생님을 좋아했다.    


 드디어 대학 예비고사를 치르는 날이 다가왔다. 결과는 그런대로 만족스럽게 나왔다. 어렸을 때의 꿈이 선생님이었고 부모님이 원하셨기 때문에 학교에서 서울대학교에 원서를 내 보자고 권유하셨지만 주저하지 않고 서울교육대학교에 원서를 내어 당당하게 합격하였다. 서울교대에 합격한 날 아버지께서는 덩실덩실 춤을 추셨고 주위에 자랑도 많이 하셨다. 나도 왠지 부모님께 효도한 것 같아 기뻤고, 어릴 때의 꿈을 이룬 것 같아 뿌듯하였다.

     


 이렇게 공붓벌레였던 나는 어른이 되어서는 일벌레로 변하였다. 일이 있으면 일 중독자처럼 그 일을 다 처리하기 전까지 일을 놓지 못했다. 일에 꾀를 부릴 만도 한데 성격상 그렇게 하지 못했다. 물론 다른 사람에게 미루거나 대충 하지도 못하였다. 그래서 늘 피곤하고 스트레스가 쌓일 때도 많았다. 하지만 일을 두고 안 하는 게 더 스트레스여서 기어코 일을 끝내야 속이 시원하였다. 이런 나였기에 가정과 직업을 병행하면서 여기까지 왔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목 디스크로 요즘 고생하고 있다. 한 손으로 하는 탁구, 배드민턴 등의 운동도 못한다. 오른손을 많이 쓰면 저려서 물건을 기도 버겁다. 공붓벌레, 일벌레는 성취감은 느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지나치면 건강을 해칠 수 있다. 나의 몸 컨디션에 맞추어 잘 조절하며 살아야 하겠다.     


 요즈음 생각이 달라졌다. 프란치스코 기도문처럼 내가 할 수 있는 일에는 최선을 다하고, 내가 할 수 없는 것은 체념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지려고 한다. 그리고 인간은 완벽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완벽한 사람이 아니기에 다른 사람의 실수도 용서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다 사람이 하는 일인데 고칠 수 있으면 고치면 된다고 생각한다.      


 나이 듦의 좋은 점은 여유가 생긴다는 거다. 보는 시야도 넓어지고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배려할 수 있는 마음이 커진다. 그래서 나는 나이 드는 게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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