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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미래 Jan 21. 2024

《사랑을 무게로 안 느끼게》 박완서 에세이

'주말농장-서울 아이와 시골 아이' 오마주 에세이


박완서 작가님 에세이를 읽었다. 에세이라서 가볍게 읽어도 되지만, 3일 동안 꾹꾹 눌러서 정독하였다. 책을 펼치는 순간부터 가슴이 설레었고 궁금했다. 에세이는 1970년대부터 90년대에 쓰인 46편의 에세이다. 작가의 눈길이 닿고 생각이 머물러 있던 당시의 사건과 상황, 주제가 고스란히 담긴 이 세심한 기록을 통해 30여 년간 우리 사회가 어떤 고민을 했고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 찬찬히 들여다볼 수 있었다.


1970년대에 나는 중학교와 고등학교 학생이었으며, 2년 제이긴 하지만 대학생이었다. 80년대에는 교사로 살았고, 90년대에는 두 아들의 엄마로 살았기에 시대상을 반영한 박완서 작가님 에세이가 공감되었다. 읽으며 그 시절을 추억하였다.


박완서 작가님 에세이를 읽으며 그동안 내가 쓴 에세이가 어린아이 글처럼 느껴졌다. 글쓰기 책을 여러 권 읽었지만, 그 여러 권보다 글쓰기의 길을 알려주는 귀중한 책이 되었다.


46편 에세이 중에서 한 편을 골라서 오마주 에세이를 써 보려고 한다.


이 책은 2002년 출간 된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박완서 작, 세계사 출판)를 재편집하여 2024년 1월 22일 세계사컨텐츠그룹에서 발행한 책입니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 피는 산골


  나는 시골 출신이다. 그것도 아주 첩첩산중 산골 출신이다. 태어나긴 강원도 명주군(지금은 강릉시에 편입됨)에서 태어났지만, 친정아버지의 전근으로 여섯 살 가을부터 강원도 홍천군 내면에서 살았다.

  친정아버지는 강릉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강원도 묵호에서 초등학교 교사를 하였다. 어떤 연유인지는 모르지만, 갑자기 홍천군 내면에 있는 초등학교로 발령이 나셨다. 언젠가 친정엄마에게 여쭈어보았는데 교장 선생님께 미움을 받아서 쫓겨 갔다고 하셨다. 사실인지는 확인할 방법이 없지만, 아버지가 미움을 받아서 좌천되신 것은 확실한 것 같다. 그 시대이니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생각하는 친정아버지는 아이들을 정말 사랑하셨다. 몸이 아프셨을 때도 방학까지 기다려서 서울에 있는 대학병원을 찾으셨다. 그땐 너무 늦어서 손 쓸 수 없었다. 결국 암으로 돌아가셨다. 자라면서 한 번도 아버지께 야단을 맞은 적이 없다. 인자하시고 친절하셨으며 순하셨다. 지금까지 내가 만남 선생님 중에서 가장 착하신 분이다.

  그곳은 같은 강원도이긴 하지만, 대관령을 굽이굽이 넘어서 먼 곳으로 발령이 나서 부모님은 걱정이 많았다고 하셨다. 아버지는 먼저 학교에 부임하고 친정엄마는 우리 삼 남매와 중풍에 걸리신 아버지를 모시고 뒤늦게 학교 관사로 이사하게 되었다. 연로하신 할아버지까지 모시고 가야 해서 힘드셨다. 그곳에서 할아버지 상을 치르고 양지바른 곳에 할아버지를 모셨다. 지금도 할아버지 산소가 홍천군 내면에 있다. 요즘도 추석 즈음에 막내 남동생이 산소에 가서 벌초한다.

  아버지가 발령 난 학교는 당무국민학교 였는데 아주 작은 학교였다. 학급수가 세 개인 학교였다. 1, 4학년, 2, 5학년, 3, 6학년이 한 교실에서 공부하는 복식학교였다. 나는 3학년까지 그 학교에 다녔다. 산골이어서 추억이 정말 많다.


박완서 에세이집 중

  사방이 산이라 봄이면 동네 아주머니들 따라서 산나물을 뜯으러 다녔다. 엄마 말에 의하면 어릴 때 나는 아주 부지런했다고 다. 고사리도 꺾어오고 산나물도 뜯어오고 쑥도, 냉이도 캐 왔는데 나물이라고 생긴 것은 다 캐 와서 늘 가장 많이 가져왔다고 한다. 물론 버릴 것도 많았다며 그래도 어찌나 기특한지 늘 칭찬해 주었다고 하셨다.

  남동생들과 냇가에서 가재도 잡아 오고 물고기도 잡았다. 교사일 때 피검사로 여러 가지 건강 검진을 해준다고 해서 한 적이 있다. 그때 놀랍게도 디스토마라는 기생충이 몸에 있다는 결과지를 받았다. 너무 놀라서 의사인 남동생에게 물어보았더니 어릴 때 가재를 익히지 않고 먹어서 그럴 거라고 했다. 다행히 약을 먹고 완전하게 치료했다.

   봄에는 뽕나무에 올라가서 오디를 땄고, 진달래 동산에서 진달래꽃을 따 먹었다. 어른들이 산에 가면 문둥병자가 진달래꽃 따 먹는 사람을 데려간다고 조심하라고 말했지만, 친구들과 산으로 자주 놀러 갔다. 어떤 때는 스르륵 뱀이 지나가서 놀란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지금 생각하면 참 겁이 없었다. 여름에는 냇가에서 친구들과 멱을 감고, 가을에는 앞산에서 밤을 주워왔다. 어릴 때 산골에서 산 것이 참 좋다.  

  내가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배려하며 서두르지 않고 여유 있게 사는 것은 어릴 적에 시골에서 살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즉 자연의 본질을 닮은 겸허함과 정직함을 가지고 있지 않나 싶다. 


'주말농장-서울 아이와 시골 아이'편(p. 232)
'주말농장-서울 아이와 시골 아이'편(p. 233)

  박완서 작가님 부모님처럼 우리 부모님도 나의 장래를 걱정하셔서 국민학교 6학년 때 외가가 있는 강릉으로 전학을 시켰다. 강릉은 도시이긴 하지만 외갓집은 선교장 근처로 강릉에서는 변두리 시골이었다. 외갓집에는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 그리고 상처하신 이모와 사촌 동생 둘이 초가집에서 생활하였다.

  외할아버지가 6학년 가을에 돌아가셔서 그 이후에는 외할머니와 이모가 생계를 책임지셨다. 봄부터 여름에는 누에고치를 쳐서 팔았고, 겨울에는 가마니를 만들어 팔았다. 집 앞 텃밭에서 기른 시금치와 호박 등을 내다 팔기도 하며 생계를 유지하였다.

  사촌은 여동생과 남동생이었는데 나를 잘 따랐다. 지금도 강릉에 살고 있어서 강릉 갈 때마다 만나고 온다. 모두 아들딸 낳고 잘 살고 있다.

  외갓집 마당에는 작은 꽃밭이 있었다. 노란 달리아와 접시꽃, 봉숭아, 백일홍이 있었고, 맨 앞줄에는 늘 채송화가 심겨 있었다. 나는 꽃에 관심이 많아 지금도 베란다에서 화분을 많이 가꾸고 있다. 꽃 이름도 많이 안다. 학교를 오갈 때마다 보았던 달맞이꽃이며, 찔레꽃, 개망초, 아기 똥 풀, 조리풀 등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나는 국민학교 때도 골에서 자랐고, 중고등학교 때도 시골에서 자랐다. 대학을 서울로 왔기 때문에 대학 이후에는 줄곳 서울과 천에서 살았다. 누군가 고향이 어디냐고 물으면 자신 있게

"강릉에서 고등학교까지 다녔어요."

라고 말한다. 고향이 골이라는 것이 자랑스럽다.    

  시골에서 살았기에 주말농장이나 전원주택을 꿈꾼다. 손자가 생겨서 그 마음은 더욱 절실하다. 우리 아들 둘은 도시에서 키웠지만, 손자들은 시골 생활을 맛보게 하고 싶다. 남편이 퇴직하면 생각해 봐야겠다. 지금도 큰 남동생이 강원도에 귀농하여 살고 있어서 시간 있을 때마다 손자를 데려가서 시골의 따뜻함과 여유로움을 느끼게 해주려고 한다. 도시에서 나고 자랐지만, 그래도 아들 둘이 남에게 폐 끼치지 않고 지금까지는 잘 살아서 참 고맙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오마주한 챕터

*이 글이 박완서 작가님을 그리워하고 다시 만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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