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줌마가 된 소녀를 위하여'를 필사하며
모진 세월 가고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아줌마가 된 소녀를 위하여
김기택
마흔이 넘는 그녀는
아직도 나를 오빠라고 부른다
오빠, 옛날하고 똑같다!
오빠, 신문에서 봤어
오빠, 시집도 읽었어. 두 권이나!
얼굴은 낯설었으나 웃음은 낯익었다
그녀는 웃을 때마다 중년의 얼굴에서
옛날에 보았던 소녀가 뛰어나왔다
작고 어리던 네가
다리 사이에 털이 나고 브래지어도 차는
크고 슬픈 몸이 되었구나
네 가녀린 몸을 찢고
엄마보다 큰 고등학생 딸과
중학생 아들이 나왔구나
긴 세월은 남편이 되고 아이들도 되어
네 몸에 단단히 들러붙어
마음껏 진을 빼고 할퀴고 헝클어뜨려 놓는구나
삼십여 년 전의 얼굴을 채 익히기도 전에
엄마와 아내를 찾는 식구들이 쳐들어오자
소녀는 얼른 웃음을 거두고
오빠, 갈게
손 흔들며 맑게 웃을 때 잠깐 보이던 소녀는
돌아서자마자 수다를 떨며
다 큰 아이들에게 잔소리를 퍼부으며
다시 흔한 아줌마가 되었다
-김기택 시집 《소》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