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미래 Nov 07. 2022

학교 옆 은행나무 길을 기억하다


학교 옆 은행나무 길을 기억하다


아주 오래전

봄바람에 추위가 조금씩 도망가기 시작한 1980년 3월 2일 두꺼운 외투 벗어버리고

따뜻한 햇살 따라 낯선 이 길에 들어섰다

그 길에 꽃밭을 가꾸고

그 길을 따라 인생을 꿈꾸며

그러다 이별의 순간을 맞이하기도 했다

    

그 길의 은행나무는 하늘로 쉼 없이 쑥쑥 자랄 거라 생각했다

바람이 불어도 눈비가 내려도 끄떡없이 그 길을 지키리라 여겼다

그러나 그 길은 비가 오면 움푹 파여 물이 고이고

태풍이 불면 가지가 찢어지며 상처가 났다

사계절 푸르기만 할 것 같던 그 길이

겨울이 되면 앙상한 가지만 남아 추위에 떨었다  

   

다른 길은 너무 낯설고 멀리 있어 내 길이 아닌 것 같기에

오랫동안 그 길만 걸었다

수없이 지나 온 길이기에 익숙하고

아픈 상처가 있어도 봄이 되면 새 살이 돋아 좋아질 거라 믿으며

학교 옆 은행나무 길을 매일 걸었다     


은행나무 길에서 아이들의 해맑은 웃음소리가 들리면

모든 시름 바람 따라 날아가고

힘들었던 날들은 기억 속에 묻고

새로운 힘으로 다시 시작했다    

 

세월만큼 든든해진 은행나무는

햇병아리 같던 그 시절

실수투성이던 나를 묵묵히 바라보며 지켜주었다

연둣빛 보드라운 아기 손 같던 잎사귀

여름 햇살에 진한 청록색으로 거칠어지고

속이 꽉 찬 열매 주렁주렁 달려 무게 이기지 못하고 내동댕이치기를 수없이 반복할 동안

그렇게 묵묵히 그 자리에 있어 주었다     


그 길에서

기쁨도 나누고 행복도 자랑하고 성공도 이야기하며

그렇게 긴 세월을 지내왔다

그러나 때론

실수에 눈물 흘리며 한숨도 털어버렸고

노랗게 익어버린 아픈 상처도 떨구어내며

오랫동안 그 길을 떠나지 못했다     


이제 나는 42년 6개월 동안 매일 걷던 그 길을 떠난

그 길을 벗어나면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아 두렵다

그 길과 똑같은 길을 찾을 때까지 헤매겠지

아니

그 길과 비슷한 길만 있어도 달려가 덥석 손 잡을 것을  

   

내 앞에 어떤 길이 찾아질까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릴 수도 있고

아마 영원히 그 길을 찾을 수 없어

매일매일 방황하게 될까 봐 무섭다    

 

학교 옆 은행나무 길이 너무 그립다

다시 갈 수 없기에 더 생각난다

오랜 기간 동안 너무 익숙해 눈을 감고도 다닐 수 있었던 학교 옆 은행나무 길을

오래도록 기억할 것 같다     


난 다시 태어난다고 해도 그 길을 다시 걷고 싶다

그 길이 숙명임을 오늘 깨달았다

 



퇴직하며 시원했는데 가끔 그곳이 그립네요.

학교를 떠난 후 방금 퇴직한 듯 그리움을 담아 써 보았어요.

매거진의 이전글 아기 새의 귀향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