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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하늘도화지에 그리고 싶은 그림
학교 옆 은행나무 길을 기억하다
by
유미래
Nov 7. 2022
학교 옆 은행나무 길을 기억하다
아주 오래전
봄바람에 추위가 조금씩 도망가기 시작한 1980년 3월 2일 두꺼운 외투 벗어버리고
따뜻한 햇살 따라 낯선 이 길에 들어섰다
그 길에 꽃밭을 가꾸고
그 길을 따라 인생을 꿈꾸며
그러다 이별의 순간을 맞이하기도 했다
그 길의 은행나무는 하늘로 쉼 없이 쑥쑥 자랄 거라 생각했다
바람이 불어도 눈비가 내려도 끄떡없이 그 길을 지키리라 여겼다
그러나 그 길은 비가 오면 움푹 파여 물이 고이고
태풍이 불면 가지가 찢어지며 상처가 났다
사계절 푸르기만 할 것 같던 그 길이
겨울이 되면 앙상한 가지만 남아 추위에 떨었다
다른 길은 너무 낯설고 멀리 있어 내 길이 아닌 것 같기에
오랫동안 그 길만 걸었다
수없이 지나 온 길이기에 익숙하고
아픈 상처가 있어도 봄이 되면 새 살이 돋아 좋아질 거라 믿으며
학교 옆 은행나무 길을 매일 걸었다
은행나무 길에서 아이들의 해맑은 웃음소리가 들리면
모든 시름
바람 따라 날아가고
힘들었던
날들은 기억 속에 묻고
새로운 힘으로 다시 시작했다
세월만큼 든든해진 은행나무는
햇병아리 같던 그 시절
실수투성이던 나를 묵묵히 바라보며 지켜주었다
연둣빛 보드라운 아기 손 같던 잎사귀
여름 햇살에 진한 청록색으로 거칠어지고
속이 꽉 찬 열매
주렁주렁 달려 무게 이기지 못하고 내동댕이치기를 수없이 반복할 동안
그렇게 묵묵히 그 자리에 있어 주었다
그 길에서
기쁨도 나누고 행복도 자랑하고 성공도 이야기하며
그렇게 긴 세월을
지내왔다
그러나 때론
실수에 눈물 흘리며 한숨도 털어버렸고
노랗게 익어버린 아픈 상처도 떨구어내며
오랫동안 그 길을 떠나지 못했다
이제 나는 42년 6개월 동안 매일 걷던 그 길을
떠난다
그 길을 벗어나면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아 두렵다
그 길과 똑같은 길을 찾을 때까지 헤매겠지
아니
그 길과 비슷한 길만 있어도 달려가 덥석 손 잡을 것을
내 앞에 어떤 길이 찾아질까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릴 수도 있고
아마 영원히 그 길을 찾을 수 없어
매일매일 방황하게 될까 봐 무섭다
학교 옆 은행나무 길이 너무 그립다
다시 갈 수 없기에 더 생각난다
오랜 기간 동안 너무 익숙해 눈을 감고도 다닐 수 있었던 학교 옆 은행나무 길을
오래도록 기억할 것 같다
난 다시 태어난다고 해도 그 길을 다시 걷고 싶다
그 길이 숙명임을 오늘 깨달았다
♧
퇴직하며 시원했는데 가끔 그곳이 그립네요.
학교를 떠난 후 방금 퇴직한 듯 그리움을 담아 써 보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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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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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미래
에세이 분야 크리에이터
직업
시인
주말마다 손주 육아하는 할머니
저자
2022년에 퇴직했습니다. 퇴직 후 모든 일상이 글감이 되어 글로 반짝입니다. 평범한 일상에서 행복을 찾기 위해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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