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산은
나에게 산은 아픈 기억이 있는 곳이다. 에게 산은 아픈 기억이 있는 곳이다.
산골에서 약한 아이로 태어났기에 산을 가지 않아서 늘 산이 궁금했었다.
7살 어린 나이에 동네 오빠들이 산으로 나무를 하러 간다고
동네가 시끌벅적했던 상황이 지금도 어렴 풋이 기억난다.
늘 학교에 갔다 오면 집에 혼자 있던 나는 오빠들을 따라서 산에 가보고 싶어졌다.
아버지가 쓰시던 낫을 찾아들고 오빠들을 따라 동네
산으로 갔다. 도대체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낫을 들고
가다니 나의 호기심이 정말 대단했다.
오빠들이 낫을 사용하는 법도 가르쳐 주지 않았는데
왼손으로 낫을 들고 오른손으로 나무를 한 움큼 잡고
낫을 내리쳤다.
처음으로 내리친 낫이 내 오른손 새끼를 제대로 쳐버렸다.
피가 철철 나고 동네 오빠들은 비상이 걸렸다.
어떤 오빠였는지 모르지만 자기의 옷을 찢어서 내 손가락을 둘둘 말아 꼭 눌러 주었다. 피를 본 나는 얼마나 울었던지..
내가 나에게 큰 상처를 내버렸다.
지금도 새끼손가락에 큰 상처가 있다.
얼마나 아폈을까? 글을 쓰다가
나를 꼭 안아주며 나에게"미안해 미안해"
말해주었다.
부모님께 얼마나 혼났는지 그 뒤로 산골에 살면서도
산에 가본 적이 없다.
그 뒤로도 동네 오빠랑 친구들은 학교에 갔다 오면 나무를 하러 산으로 갔지만 나는 산을 등지고 살았다.
세월이 얼마나 흘렀을까? 20대에 교회 청년들과 다시 슬슬 산을 다니기 시작했다. 그때는 왜 그렇게 산을 많이 갔을까 모르겠다. 단합을 산을 다니면서 했다.
일요일에 못 가니 공휴일에는 거의 등산을 했던 것 같다.
그중에서도 기억에 남은 산이 있다.
우리나라 최고의 산인 지리산의 추억을 되살려본다.
23살 즈음 장대비가 쏟아지는 8월 어느 날 밤
교회 청년 20명 정도가 지리산 야간 등반을 가게 되었다.
겁도 없이 따라붙은 나는 비에 젖은 생쥐가 되어 캄캄한 밤에 산을 오르고 또 올랐다.
가도 가도 산장이 나오지를 않았다.
밤이라 위험하다고 조를 짜서 조장한테 조원들을 잘 데리고 오도록 했다.
거의 남자 청년이었고 여자는 3명 정도였다.
비에 미끄러져 데굴데굴 구르기도 하고 넘어지느라 자꾸만 뒤에 쳐지자 우리 조장인 동수는
화를 내며 나에게 한 번만 더 넘어지면 그냥 놓고 간다고 짜증을 냈다. 나 때문에 얼마나 힘들었을까?
고통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캄캄한 밤에 혼자 다시 내려갈 수도 없고 죽더라도 같이 오를 수밖에 없었다.
정말 죽을 것 같았다. 속으로 몇 번이나 다짐했다.
'다시는 산에 오지 않을 거야'
엄청난 비 때문에 예상 시간보다 늦게 도착했다.
새벽 2시 정도에 우리는 장터목 산장에 가서 남자 여자 할 거 없이 다 젖은 옷을 그대로 입고 쭈그리고 그냥 잠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 일찍 천왕봉 정상을 간다고 하는데 대부분은 일어나지도 못하고 포기했다.
나는 여기까지 온 것이 억울해서 천왕봉에 오르기로 했다.
아침에도 가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파란 비닐봉지에 구멍을 내서 비옷처럼 입고
따라나섰다.
정상에 올라갔을 때 아쉽게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사방이 안개로 가려져 있었다.
그래도 남는 것이 사진이라고 천왕봉 정상에서 찍은 사진을 보니 감회가 새롭다.
죽어도 다시는 산에 안 간다고 했던 내가
어느 날부터 산을 좋아하게 되었다.
모악산은 셀 수도 없이 많이 갔다. 전국의 산을 아주 많이 다녔다. 그야말로 원 없이 다녔다.
몇 년 전에는 히말라야 트레킹도 다녀왔다.
우리나라 산은 얼마나 예쁜가 사계절이 있어서 질리지도 않고 언제 가도 좋다.
미국의 척박한 산을 보니 내가 대한민국에 살고 있음이 얼마나 행복하고 자랑스러운지 감사가 절로 나온다.
나의 꽃다운 20대 청춘을 훈련시킨
해병대 같은 지리산 야간 등반의 추억을
떠올려보니
이젠 히말라야도 다시 도전할 수 있을 것 같다.
지금의 열정으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