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끼 손가락 걸며 약속했던 그사람
아주 까마득한 이야기인데도 그날의 풍경은 지금도 기억 속에서 살포시 떠오른다. 모든 만남은 시간이 흐른 뒤에야 비로소 그 소중함의 깊이를 께닫게 된다
.스무 살 무렵, 몇 달간 친구 집에 기거하며 부품 가게 경리로 일하던 때였다. 어느 날 회식을 마치고 9시쯤 귀가하는데, 시청 근처에서부터 누군가 나를 따라오는 기분이 들었다. 뒤를 돌아보니 또래로 보이는 남학생 하나가 걷고 있었다. 한참을 걸다 좁은 골목길로 들어서자 등 뒤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저기요, 잠깐만요!"
덜컥 겁이 났다. 나는 태연하게 가로등 아래쪽으로 그를 오게 하였다.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가로등 아래에서 본 그의 얼굴은 다행히 무섭게 생기지는 않았다 웃는 미소가 선해 보였다. 그는 00대학교에 다니는 1학년 학생인데, 시골에서 올라와 외로움을 타던 차에 여자친구를 사귀고 싶어 용기를 냈다고 했다. 맨정신으로는 쑥스러워서 맥주 두 잔을 마시고 시청 앞에 앉아 있다가 나를 따라왔다고 했다. 그의 고백이 순수하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당시의 나는 남자를 사귀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찻집에 가자는 그의 제안을 밤이 늦었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4일 뒤 7시에 저기 찻집에서 만나자고 제안을 했다. 4일 뒤면 시험이 끝난다고 하자 나는 알겠다고 그때 보자고 하고 얼른 자리를 피하려 했다.
그는 갑자기 새끼손가락을 걸고 약속을 하자고 했다. 나는 어서 집으로 가려고 장갑을 낀 채로 손을 내밀었다.다시 장갑을 벗고 약속하잔다. 할 수 없이 장갑을 벗고 약속을 했다. 나는 4일 후 약속 장소에 나가지 않았다. 혹시라도 마주칠까 봐 한 달 동안 반대편 길로 돌아다녔다. 그와의 인연은 그렇게 끝나는 줄 알았다.
3년 뒤, 야간 신학교에서 고등학교 3학년 때 같은 반 친구를 만났다. 친구와 친하게 지내던 어느 날 나를 자취방으로 초대를 했다. 오빠와 함께 지낸다기에 별생각 없이 따라갔다. 자취집에서 문을 열고 나온 오빠를 보는 순간 나는 얼어붙고 말았다.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하였다. 3년 전 가로등 밑에서 손가락을 걸며 약속했던 그 사람이었다. 다행히도 그때 술기운에 나를 보았던 터라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 후로 친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나는 그 일을 혼자 가슴에 묻어두기로 했다.
시간은 흘러 내가 둘째를 낳으러 병원에 갔을 때, 엘리베이터 앞에서 기적처럼 그를 다시 만났다. 이번엔 그가 먼저 나를 알아보았다. 그의 아내도 이틀 전 같은 병원에서 아이를 낳았다고 했다. 그는 내 병실까지 찾아와 살뜰히 안부를 물었고, 퇴원하는 날에는 내 짐을 차에다 옮겨주었다. 세상에 이렇게 다정하고 세심한 사람은 처음 보았다.이런 그를 내가 외면했다니, 그는 사람이라기보다 천사에 가까워 보였다.
나중에 친구를 통해 들으니 그는 목사가 되어 목회를 하고 있다고 했다. 언젠가 한번은 그를 찾아가 "그때 약속을 어긴 사람이 사실은 나였다"라고 고백하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했다. 나를 만나지 않은 것이 다행일 수 있다. 뜻이 아니어서 그랬을 것이다. 지금도 내 마음속에 천사로 남아있는 소중한 인연을 꺼내어 보니 내 마음이 따스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