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면을 좋아한다. 하루에 3끼를 면으로 먹어도 별 문제가 없을 정도이다.
면을 좋아하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그 간편한 식감 때문이다. 호로록하고 목을 타고 넘는 면빨이 주는 찰나적 쾌감을 극단적으로 즐기는 몇몇 이웃나라 사람들은 애초에 우동면을 씹지 않고 넘기기도 한다고 한다.
그뿐인가. 국물은 또 그렇게 맛이 있을 수가 없다. 인스턴트 라면 앞에 왜 '인스턴트'라는 말이 붙는지도 모르던 시절부터 부리나케 라면 국물을 들이켜 왔다. 어른이 되면서-내 정신적 나이에 비추어 보면 정확히는 몸이 크면서가 맞겠지만- 세상에는 그보다 조금 더 "고급스러운" 맛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동이나 라멘 같은 것들 말이다. 물론 정성이나 영양의 면에서 실은 가장 수준이 높은 것은 어릴 적 집에서 입맛이 없을 때 엄마가 해주시던 국수나 칼국수라는 건 조금 더 이후에 알게 되었지만.
이런 내게 누군가가 '당신 생각은 틀렸다. 면식은 영양학적으로 그렇게 균형이 잡혀 있다거나 다른 음식에 비해 맛이나 식감이 탁월한 것도 아니다.'고 한다면 참으로 슬픈 일일 것 같다. 아마 나는 그 말을 곱씹어 보기 전에 심정적으로 거부를 하게 되지 않을까. 뭔가 상대방의 말을 거부해야 할 이유를 찾고 싶지 않을까.
그런데 나 같은 사람이 하나가 아니라,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여럿 모여 있다면 어떨까. 그때부터 어떤 반대의 말들에 대해 귀를 열고 경청할 수 있을까?
대부분은 거부를 하는 것 같다. 적어도 내가 내 주변, 우리나라에서 본 모습들은 그랬다. 어느 하나의 멋진 주장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이유가 있으면, 사람들은 처음에는 그 '이유'에 환호한다. 그리고 그 사람의 말을 따라 그 집단에 속하는 길을 택한다. 여기까지는 가슴과 머리가 섞여 있다고 해도 어디까지나 뒤의 것이 더 큰 작용을 하는 것 같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는, 정확히는 반대의 말들이 나올 때부터 불필요한 유대와 결속이 강화 또는 강제된다. 이성적인 거절이 아니라 심정적인 거부가 발휘된다. 내가 좋아하는 것에는 이유가 필요했지만, 싫어하는 것에는 이유가 필요 없게 된다. 그저 싫을 뿐이다.
이런 것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그 집단에 속한 사람들에게 '거꾸로 된 삶'을 살게 한다. 일단 결론, 성향으로 생각의 방향을 정한 후에 그에 들어 맞는 이유, 근거들을 취사하게 한다. 이유가 결론을, 결론이 동조를, 동조가 거부를 만들어 내는 구조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어느 순간부터는 내가 왜 내 맞은 편에 있는 것을 싫어하게 되었는지는 이유도 모르게 된다.
우리가 지금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