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자의 퇴사계획 - 03

본격적인 기획자로의 길에서의 배움

by 채움

두 번째 회사에서 나는 2년 6개월을 일했다.
짧지 않은 시간이었고, 그만큼 많은 경험이 쌓였다.


입사 초기에는 운영 업무를 맡았다.

맡은 제품에 대한 도메인 지식이 부족해서

회사에서는 몇 개월 간이라도 직접 운영을 해 본 뒤

제품 기획을 맡기고 싶어 했다.


서비스 운영, 고객 응대, 콘텐츠 관리,

백오피스 파악 등 기본적인 업무부터 시작했다.
운영이라는 역할은 아직 익숙하지 않았다.

전화, 이메일 등 고객의 요구사항이나 문의가 접수되면

CRM툴에 기입하고 문제를 해결하면서 제품 파악하는 것은

높은 커뮤니케이션 스킬과 이해도를 요구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신입 사원이었고,

우선은 환경에 대한 적응과

주어진 일을 잘 해내는 것이 우선이었다.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이 4개월 정도가 흘렀다.


어느 날, 기획서를 영문으로 정리해 달라는 요청이 들어왔다.
갑작스러운 문서 작업이었지만,

밤을 새워 오롯이 혼자서 600페이지가 넘는 기획안을 번역했고

그 일을 계기로 기획 업무와 처음 연결되었다.

당시 상사가 사내 유일한 기획자였고,

완성된 번역본을 보고는 달러를 조금 주며

다음 달 해외 출장을 가야 한다고 했다.

이후 스며들듯 기획 일에 참여하게 되었다.


출근하면 전화받고 운영하고 밤엔 기획하고를 반복하다

해외 프로젝트에 투입된 것이 전환점이 되었다.

영문 문서를 작성하고, 시차에 맞춰 회의에 참석했으며,
국내 본사와 외부 협력사, 해외 개발자들과 협업했다.
그 프로젝트부터 나는 정석 기획자로 일했다.
내가 정리한 요구사항서와 플로우차트를 기반으로 개발이 진행되었고,
자연스럽게 기획자로서의 역할이 자리 잡았다.


이 회사에서는 문서 작업도 매우 체계적이었다.

여러 이해관계자들과 회사, 에이전트, 정부 기관 등이 연결되어 있어

항상 문서 표준에 따라 커뮤니케이션해야 했다.
MRD, BRD, IA, 플로우차트, 와이어프레임, 유저케이스 등
기획의 전 과정을 정석대로 경험할 수 있었다.
수십 번의 회의와 피드백, 문서 수정을 반복하며 체력을 소모하기도 했지만,
그만큼 사고의 틀이 잡히고 실무 역량도 성장했다.


내가 만든 문서를 본 한 PM은
내 나이대에서는 "기획자로 다섯 손가락 안에 꼽는다"는

말을 해주기도 했다.
그 말이 큰 동력이 되었고, 그 당시엔 스스로도 만족스러웠다.


하지만 그때부터 내 안에서 변화도 생기기 시작했다.


업무량이 많았고, 워라밸은 없었다.
주말에도 업무 메시지가 오고, 야근은 일상이었다.

매일 호텔방에 흐릿한 불빛 밑 커피테이블에서

까마득하게 쌓여있는 문서를 읽고 쓰고...

34시간 비행이 예사였던 건 물론이고,

출장 갔던 기간을 합치면 한국에 있을 시간이 없었다.

한국에도 없는데, 워라밸이란 건 상상할 수도 없었다.
몸이 점점 버티지 못했고, 허리 통증이 이어졌다.


그러다 어느 날 공항에서 내리는데 '툭' 하는 소리가 나고 주저앉았다.

병원에 가보니 이미 허리가 많은 부담을 받고 있었다.


언제 완쾌가 될지,

언제 다른 회사를 갈 수 있을지,

아무 기약도 없이 결국 퇴사를 결정했다.


당시 한창일 때라서 나의 실망감은 말로 할 수 없을 만큼 컸지만,

다음을 위해 몸을 회복하는 게 우선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역시 아쉬움이 남아도

이 회사에서의 시간은 내가 기획자로서 뿌리를 내리게 해 준 중요한 경험이었다.
결코 쉽진 않았지만, 그만큼 의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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