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방향이 없고, 나는 시간이 없었다
새로 들어간 회사는 매우 낯설었다.
그동안 제조업과 ‘한국다운’ 조직에서 일해왔던 나에게,
럭셔리 브랜드와 코웍하는 외국계 에이전시는
너무나 다른 세계였다.
한국인과 외국인이 반반.
한국어는 팀장에게서만 들을 수 있었다.
나머지는 전부 영어였다.
해외 파트너들과의 화상회의도,
임원과 동료와의 소통도 모두 영어였다.
출근 시간만 지키면
점심시간, 커피타임, 산책 모두 자유.
누구 하나 간섭하지 않았다.
회사는 그렇게 일하는 방식이,
직원들의 생각과 분위기에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고 믿었다.
낯설었지만 곧 적응했다.
그리고 업무에도 바로 투입되었다.
이 회사는 IT 사업 진출이 처음이었다.
시니어 기획자도, 개발자도 없었다.
모두가 서툰 환경에서
나는 혼자 시니어 PM이었다.
사내 외 미팅, 교육, 파트너 커뮤니케이션,
모든 자리에 참여해야 했다.
도메인 지식이 부족했지만
한마디도 하지 않고 묵묵히 듣는 것부터 시작했다.
새로운 조직에선 6개월간은 말보다 관찰이 먼저
그게 내 스타일이었다.
그런데,
1개월도 채 지나지 않아 회사는 갈팡질팡하기 시작했다.
시니어를 뽑아놓고
정작 회사는 스스로 무엇을 원하는지 몰랐다.
에이전시답게
글로벌 브랜드들의 니즈,
회사가 자체 개발 중인 앱,
모두 내게 던져졌다.
"우리는 방향은 모르겠지만,
당신이 옥석을 가려주길 바란다."
그런 느낌이었다.
기존 플랫폼에 소셜 로그인, CRM, 예약 기능, 지도 추가.
넉넉한 데드라인과 함께 기획을 요청받았다.
PPT로 열심히 작업했다.
초심자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그런데, 진짜 일도 초심자 같았다.
공허했다.
기획자는
문제를 발견하고,
대화하며 타개하고,
그 과정에서 성취감을 얻는다.
그런데 이곳에선
보이는 것만 말했고,
'진짜 문제'는 아무도 얘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모든 직업에 직업윤리가 있다고 믿는다.
기획자에게 그건
옳은 걸 옳다고 말하는 것
프로젝트를 올바른 방향으로 끌고 가는 것
생각을 실제로 구현하는 것
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결국 얘기했다.
몇 달 후, 대표와의 미팅에서
회사는 솔직하게 말했다.
“고객들이 우리 역량을 의심하고 있다.
우린 새로운 시선이 필요하다.”
기회였다.
나는 기획자로서 책임감과 진심으로 말했다.
보이는 것 너머의 문제들, 성능 개선의 필요성,
풍선 같은 아이디어보다 손에 닿는 실행 안이 먼저라는 것.
기획팀/개발팀 빌딩, 아이디어 디벨롭 등
할 일은 산더미였다.
대표는 공감했고, 회사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시간이 없었다.
진짜로 없었다.
다음 회사에서
나에게 솔깃한 오퍼를 제안하고 있었기 때문.
이제 나는
머무를 것인가, 성장할 것인가
선택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