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는 오름이 많기에 산을 오르는 분들도 많다.
‘어디가 제일 좋았나요?’라고 물으면 대부분 돌아오는 답은 “설산(雪山)”이다.
눈 쌓인 오름 또는 산을 가 본 적이 없던 나는 너무 궁금했다. 대체 얼마나 좋으면 다들 눈이 쌓였을 때가 최고라고 말할까.
나도 그런 마음으로 눈이 오길 기다렸다. 눈이 내린 백록담은 기상상황이나 체력상 범접하기가 만만치 않기에 많은 사람들이 눈이 내리면 윗세오름을 향한다. 나도 1년차에는 인대 파열로 윗세오름에 대한 꿈을 접고 2년차에는 눈이 오기 전에 여러 번 등반하다가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역시나 올해도 폭설이 내려 한라산은 며칠동안 통제 후 해제령이 떨어져 채비를 하고 달려갔다. 그런데 악명높은 주차난을 겪었다. 아예 매표소에는 진입도 못하고 차를 돌려 갓길에 주차를 하고 정상까지 걸어가야하는 상황이었다. 왕복 두 시간이상 추가되고 입산 통제시간도 걸리기에 또다시 다음을 기약하며 차를 돌렸다.
윗세오름을 못 갈 때에는 차선책으로 어승생악을 가보자. 빙판이 된 어승생악은 가 보았지만 눈꽃이 막 내려앉은 어승생악은 또 새로워 가슴이 두근두근했다. 어승생악 주차장에 도착한 순간 아차 싶었다. 사람들 생각은 다 거기서거기구나. 우리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움직인 사람들이 주차장에 한가득이었다. 거기 모인 사람들 중 어리목코스로 윗세오름을 가려는 사람이 더 많았을 성싶다. 아이젠과 스패츠를 끼우고 스틱까지 두 손에 쥐고 비장하게 어승생악을 오른다. 눈이 이제 내린 어승생악은 탐방로가 폭신하기 때문에 아이젠이 없어도 오를 수는 있으며 스패츠와 등산스틱이 없어도 오르는 데에 지장이 없다. 다만 있다면 훨씬 수월하긴 하다. 아이젠이 눈을 꾹꾹 밟아주니 미끄러짐이 없고 스틱으로 또 한 번 꾹꾹 눌러 나를 잡아준다.
겨울왕국으로 들어서니 나무에는 눈꽃이 피어 있거나 폭설이 내려앉은 크리스마스트리들이 곳곳에 눈에 띈다. 눈에 가려 계단은 전혀 보이지 않고 온 세상이 하얗다. 하얀 카페트와 하얀 가로수들이 펼쳐지니 여기가 현실인지 가상현실인지 구분이 안 간다. 눈꽃이 가득한 나뭇가지들이 하늘을 덮고 노루가 다닌 흔적만 남아 있는 눈밭이 양 옆에 한없이 펼쳐진다. 숨을 쉬면 입김이 나오지만 몸에서는 열이 나고 나무와 수풀이 찬 바람을 막아주니 외투 속에는 온기가 가득하다. 걷다가 사진을 찍고 다시 걸으면서 앞에 일행들과 앞서거니 뒤서거니하며 걸어올라가다보면 어느 순간 파란 하늘이 눈 앞에 펼쳐진다. 그 때 뒤를 돌아보면 또 다른 눈 내린 거대한 오름과 하늘이 내 뒤를 받쳐주고 있음을 깨닫는다. 감탄과 함께 한숨을 돌린 후 다시 오른다. 탐방로 입구가 점점 좁아져 내려오는 사람들에게 길을 내주느라 서서 기다려야 한다. 그리고 코너를 돌면 마지막 계단이 나타난다. 계단을 오르는 그 순간이 짜릿하다. 숲에서 빠져나오는 쾌감과 하늘과 만나는 시원함, 뒤를 돌면 눈꽃들이 가득한 하얀 꽃밭이 펼쳐지고 멀리 푸른 제주 시내와 바다가 펼쳐진 광활한 풍경을 마주하는 감동 이 모든 것을 한 순간에 느낄 수 있다. 한참을 정상에서 서성이고 눈이 쌓인 한라산일대를 감상하고 나면 올라올 때 송글송글 맺혔던 땀이 식으며 한기가 돈다. 그 때 따뜻한 음료가 필요하다. 가져 온 보리차로 몸을 다시 데우고 추위에 급격하게 배터리가 떨어진 핸드폰으로 사진 몇 장을 더 찍고 하산한다.
백록담이나 윗세오름에 비해 입산과 하산시간이 더 자유로운 어승생악은 우리가 하산하는 오후 3시의 느즈막한 시간에도 올라오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아이들은 눈썰매나 스키를 타듯이 미끄러져 내려가고 인대파열 때문에 겁이 많아진 나는 스틱으로 한발 한발 눌러가며 조심조심 내려온다. 그래도 계단보다 눈이 무릎에는 걸어가기 더 수월한 것 같다. 올라올 때 본 풍경과 내려갈 때 본 풍경은 또 느낌이 다르다. 눈밭에 글씨를 새기기도 하고 눈사람을 만들기도 하면서 여유롭게 내려간다. 한참을 내려가다 관광객부대를 만났다. 모두 아이젠은 끼었으나 통굽부츠를 신은 여성도 있고 연세가 지긋하신 분들도 더 갈지말지 아웅다웅하며 올라가셨다. 어승생악이 그 정도로 오르기 쉬운 설산이라는 말이다.
설산에 대한 부담감이 있다면 어승생악부터 도전해보라. 성취감은 업그레이드해 주며 더 높은 산에 대한 열망도 심어줄 아름다운 오름 어승생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