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0고지
대한민국 타도시에 비하면 따뜻한 남쪽 섬 제주. 따뜻한 제주에도 겨울은 있다. 바람이 불면 서울의 북서풍보다도 따갑고 매섭다. 그래서 제주도는 겨울에 관광객의 발길이 뜸해진다. 심지어 제주도민들도 따뜻한 나라를 찾아 떠나기도 한다. 이런 겨울에 제주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어디를 가면 제주를 만끽할 수 있을까?
제주에 입도한 첫 해 겨울에 상상도 못한 일을 겪었다. 크리스마스 직전에 폭설이 내린 것이다. 큰 도로는 그나마 제설차가 다니니 제설이 조금 되긴 하지만 주택 골목골목은 제설이 전혀 되지 않는다. 수도권처럼 차들이 많이 지나 다니지도 않으니 녹을 리가 없다. 심지어 눈이 얼어 붙은 길에서는 차가 헛돌고 조그마한 언덕조차 차가 올라갈 수 없었다. 당시 애월 중산간에 살고 있었는데 집 앞에 눈이 너무 많이 내리고 쌓여 강원도 스키장을 방불케할 정도였다. 집 앞이 경사가 가파라 웬만한 눈썰매장보다 스릴있을 정도다. 이러니 체인없는 차는 경사 위로 올라가는 건 꿈도 못 꾼다. 난생 처음으로 고립이라는 것을 경험했다. 길이 얼어붙어 체인이 없는 내 차는 오도가도 못한다. 시내에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오르막을 못 올라 차를 동네 어귀에 버려두고 걸어와야 했다. 흥미로운 건 제주 시내나 해안가에 사는 이들은 이런 상황을 전혀 모른다. 저지대와 고지대 적설량 차이가 어마어마하다. 말그대로 중산간은 산자락이니 강원도 산골이나 마찬가지다. 우리는 폭설이 와서 고립되서 나갈 수가 없다고 하는데 해안가 사는 친구는 눈이 쌓이지조차 않았다며 이해를 못 한다. 이런 고립을 몇 번 겪으니 이제는 눈이 무섭다. 눈이 온다하면 장부터 보고 먹을 것을 쟁여 놓아야 하며 월동준비에 들어가야 한다.
이렇게 눈 트라우마가 생긴 나에게도 눈이 좋을 때가 있다. 눈꽃 구경이다. 눈소식이 들리면 가보아야 할 곳이 1100고지 습지이다. 저 멀리 한라산 자락에 하얀 모자가 드리우면 달려간다. 1100고지는 해발 1100m에 위치한 휴게소이다. 지금음 GS25 편의점으로 운영하는 휴게소 앞에 제주시와 서귀포시를 잇는 1100도로가 관통하고 건너편에 탐방습지가 있다. 첫눈이 소복하게 내린 첫 해에 마음 맞는 오름 회원들과 달려갔다. 폭설이 왔을 때에는 한라산으로 가는 도로를 모두 통제하기 때문에 차가 출입이 안 되므로 며칠 두고 본 후 통제가 풀리면 가야 한다. 반면에 첫 눈이 살짝 내려앉았을 때에는 한라산 자락에만 눈이 내리기때문에 차량 통행에 무리가 없어 그 때 보는 것이 가장 수월하다.
1100고지로 가는 도로 이름이 1100도로인데 점점 고도가 높아질수록 양옆에 하얀 눈꽃나무들이 무성해진다. 나를 반겨주듯 양옆에 하얀 전령들이 두팔벌려 끝이 없는 아름다운 풍경을 선사한다. 겨울왕국에 들어섰음을 알려준다. 감탄사를 연발할 때쯤 하얀 사슴동상이 나타나면 북적대는 차와 사람들이 눈에 들어올 것이다. 주차장은 워낙 협소하기에 도로 한 쪽에 차들을 줄 세우고 습지로 달려가자. 처음부터 끝까지 데크로 깔린 1100고지습지를 걸으며 눈꽃 전경을 처음 마주하면 감탄사밖에 안 나온다. 이 1100고지 나무들은 나뭇가지에 눈송이가 내려앉은 상태로 얼어붙어 말그대로 눈꽃나무가 되어 있다. 어떤 가지에는 작은 고드름들이 바람이 불었던 방향대로 얼어있기도 하다. 아이나 어른이나 호기심에 나무에 내려 앉은 눈을 만져보다가 얼어있다는 사실을 알고 놀란다. 그리고 다시 자세히 관찰하며 눈꽃송이와 눈결정체의 매력에 빠져든다. 그렇게 한라산의 매력에 또 빠져든다.
습지에서 눈꽃 구경을 실컷하고 나오면 강한 추위를 느낄 것이다. 자연스레 맞은 편 편의점으로 눈길이 간다. 편의점은 아파트 2층 정도의 높이에 있어 계단을 올라서면 1100고지 습지를 내려다 볼 수 있다. 먼 오름 자락에 눈이 살포시 내려앉은 광경은 카메라 담기지 않을 정도로 광활하다. 살을 파고드는 추위를 잠시 잊고 눈에 꼭꼭 담아둔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면 이 아름다움을 간직하고자 열심히 사진찍는 이들, 눈싸움하는 이들, 눈썰매를 타는 이들로 시끌벅적하다. 여기에 온 사람들은 어떻게 알았는지 제주의 겨울을 잘 만끽하고 있는 셈이다.
보통 겨울하면 눈이 많이 자주 오는 강원도를 떠올리는데, 강원도의 눈은 무겁고 굵직하다면 한라산의 눈은 가볍고 아름답다는 느낌이다.
따뜻한 제주의 겨울에도 생각보다 많은 눈이 내리며 하얀 눈꽃세상을 만날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