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늑한 뒷산의 다른 이름

궷물오름

by 민작가

2월에 입도한 제주는 겨울이었다. 정말 추운 겨울이었다. 물에도 못 들어가는 추운 겨울에 방문하기 제일 수월한 곳은 단연 오름이다. 검색을 하니 집에서 가장 가까운 오름이 궷물오름이다. 아이들과 함께 오르기에 어렵지 않아 보여 먹을 것, 그릴 것 등 몇 가지 배낭에 넣어 바로 출발했다.


주차장이 제법 널찍하게 잘 정비되어 있는 데다가 마침 차량이 몇 대 주차되어 있어 약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사람이 너무 많아 붐비는 것도 싫지만 너무 사람이 없어 우리만 홀로 이 산에 있다는 생각이 들면 순간 무서움과 두려움에 휩싸여 자연을 마음껏 즐기기가 힘들다. 또한 어떤 일이 발생하면 도움을 요청할 누군가가 주변에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정신적 위안이 되기에 오름이나 올레에 사람들이 가끔 한 두명이라도 보이면 반갑기 그지없다.


사람들의 존재를 확인하고 오름 안내판을 대강 훑어보고 입구에 첫 발을 내딛는다. 안내판을 제작하신 분은 열심히 공들여 만들었을 테지만 미안하게도 내 눈에는 안내판의 글들이 잘 읽히지 않는다. 안내판의 문제라기보다는 내가 몸으로 익혀서 주변 사물이나 상황을 파악하는 경험주의자이기때문에 안내판을 꼼꼼히 읽지 않는 경향이 있다. 몇 번 인적이 드문 오름을 헤매고 난 후로는 안내판을 좀 눈여겨 읽기는 한다. 이 당시에는 무슨 배짱이었는지 잘 알지도 못하는데 그냥 무조건 직진이었다.


입구에서부터 비교적 잘 닦인 길을 따라 오르다 보면 조그만 공터가 나오는데 오른편에는 정자, 왼편에는 숲체험장이 있다. 이 공터는 족은 녹고메와 궷물오름의 갈림길이라 사람의 발길이 많이 닿는 곳이다. 나중에 안 사실인데 학교에서 견학올 때 학생들이 이 곳에 들러 간단히 간식을 먹거나 쉬기도 한다. 공터를 지나 ‘궷물오름’이라고 씌어진 안내판이 가르키는 방향로 들어서면 진정한 숲길이 우리를 반긴다. 햇살이 잘 들지 않는 우거진 숲길이라 약간 으스스한 느낌도 든다. 초행길이라 나도 긴장해서 아이들과 함께 한다는 사실에 위로를 받을 정도였다.


10여분정도 걸으면 ‘테우리막사’가 눈 앞에 나타난다. 테우리는 제주말로 목동을 뜻하고 소나 말을 산림에서 방목하고 농사일도 참여했다고 한다. 이러한 테우리들의 거처를 ‘우막집’이라고 한다. 궷물오름에 있는 테우리막사는 돌담으로 지어진 작은 방의 느낌이다. 문은 달려있지 않지만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차가운 바람을 막아주어 소나 말이 먹이를 먹는 동안 테우리에게 잠깐의 쉼을 허락해주는 공간으로 알맞아 보인다. 여름에 다시 올랐을 때엔 막사 앞에 고사리가 잔뜩 올라와 있어서 아이들이 고사리 따느라 한창 시간을 보냈다. 어쩌면 테우리들도 우리처럼 봄에 여기서 고사리따느라 해가 넘어가는 줄도 모르지 않았을까 싶다.


막사에서 5분정도 다시 올라가면 밝고 탁 트인 정상이 나타난다. 어두운 숲길에서 벗어났다는 안도감과 자유로움, 정상이라는 목표에 도달했다는 성취감에 몸이 저절로 기지개를 편다. 북쪽으로는 탁 트인 바다와 제주 시내가 내려다 보이고 남쪽에는 족은녹고메오름이 높이 솟아 있다. 대부분 오름들의 정상은 분화구를 둘러싸서 평평하거나 둥그런데 족은녹고메오름은 삼각뿔처럼 끝이 뽀죡하다. 서쪽에서 고깔모양 오름이 보인다싶으면 바로 족은녹고메이다. 모양때문인지 족은녹고메를 볼 때마다 모자처럼 애들 머리에 씌우는 상상을 하게 된다.


정상에 도달했으니 이제 내려갈 차례이다. 내려가는 길이 다시 숲으로 우거져있지만 키 큰 나무들이 쭉쭉 뻗은 높은 숲이라 몸이 움츠러들지는 않는다. 2월이라 곳곳에 녹지 않은 눈밭이 눈에 들어 온다. 아이들은 이런 새하얀 눈을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쎈은 얼른 한움큼 눈을 집어 걸어가는 내내 조물조물 무언가 만든다. 왼쪽에 갑자기 갈림길이 나타나는데 우리는 무시하고 직진한다. 계속 내리막 둘레길이다.


그 때 일정하게 무언가를 두드리는 소리가 멀리서부터 들린다. ‘숲에서 누가 망치질을 하는 걸까?’ 허무맹랑한 의문을 품으며 길을 따라간다. 아니면 ‘그 유명한 동물이 여기 있나?’하고 우리끼리 추측하며 소리에 점점 가까워진다. 설마하는 의심이 확신으로 바뀌었다. 정말 딱따구리가 열심히 나무를 두드리고 있는 소리였다. 딱따구리가 나무에 구멍을 내려면 이렇게 힘들게 쪼아야 한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내가 저렇게 쫀다면 뇌진탕에 걸려 이미 졸도할 정도로 센 강도다. 동물원에서도 보기 힘든 딱따구리가 나무에 구멍내는 장면을 목도하니 우리는 흥분의 도가니였다. 여느 가수의 콘서트보다 보기 힘든 장면 아닌가. 한창 그의 공연을 감상하고 나서 쎈이 마무리한 작품을 딱따구리 공연장 앞에 살그머니 내려놓는다. 아기 눈사람이었다. 오랫동안 녹지않고 잘 살아있게 해 달라고 빌며 하산한다. 여름에 다시 올랐을 때 당연히 눈사람은 저 세상에 가고 그 자리에 없었지만 우리들의 추억거리로 입방아에 남았다.


궷물오름은 높이가 약 600m정도 되지만 아이들이 동산에 오르듯이 쉽게 오르내릴 수 있으면서 제주 북쪽 바다가 훤히 보이는 전망을 가지고 있다. 산림욕에 적합한 숲길과 노루가 뛰노는 들판, 숲체험장도 갖추고 있으며 운이 좋으면 딱따구리도 만날 수 있다. 작지만 있을 것은 다 있는 오름계의 편의점이랄까. 우리 세 사람에게는 눈사람이 생각나는 귀여운 오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