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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나 Jun 30. 2023

부산촌년의 서울의사 되기

외과의 민낯

4월은 힘들다고 유명한 외과다. 외과 인턴은 총 3명인데 위대장 파트, 갑상선 유방파트, 간담췌 파트로 나눠서 각각 한 명씩 담당하게 된다. 나는 위, 대장 파트 인턴이었고 나머지 파트는 본교 출신의 나보다 어린 동생들이 맡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두 명은 레지던트 선생님들의 후배들로 좀 편한 파트를 미리 찜해 둔 거고, 당연히 타교 출신인 내가 가장 힘든 파트를 맡게 된 것이었다. 괜찮다. 나는 배우러 왔다.

     

위, 대장 파트는 각각 레지던트 3년 차, 4년 차 선생님들 두 분이 맡고 계셨는 게 인턴은 나 하나였다. 인턴이 하는 일은 수술환자 드레싱 및 외래 및 입원환자의 온갖 드레싱, 수술환자 준비 및 어시(환자 넣고 빼기, 수술 들어가서 시키는 일 다 하기)이다. 매일 아침 6시 40분에 있는 콘퍼런스 준비도 인턴잡이다. 그런데 외과 첫날 거의 못 자다 보니 다음날 눈을 떴는데 6시 40분이었다. 나는 평생 지각을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는데, 외과 온 지 이틀 만에 지각이라니. 부랴부랴 뛰어 내려갔으나 이미 콘퍼런스는 시작되었고 의국장 선생님의 눈은 나를 향해 있었다. 이번 외과턴은 망했다는 생각뿐이었다. 콘퍼런스가 끝나고 쌍욕 아닌 쌍욕을 먹고 하루를 시작했다. 그날부터 ‘죄송합니다’를 입에 달고 살았다. 속상했던 건 같이 도는 인턴동기 두 명은 나타나지 않는 나에게 연락 한번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왜 깨우지 않았냐는 내 물음에, ‘어머, 언니 다른 일 하고 있는 줄 알았지.’라고 웃으며 말한다. 저게 나랑 같은 방 쓰는 녀석이 할 말인가... 아, 자꾸 서울사람 욕을 하게 되네.

    

대장파트의 3년 차 선생님은 다른 과 전공의로 있다가 그만두고 다시 외과로 들어온 분으로 여러 소문이 좀 많았다. 그런데 소문과는 달리 "야, 너 이거 할 줄 아냐?" 하시면서 수술어시, 실밥제거, 드레싱 등을 잘 알려주셔서 꽤 친절한 분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선생님이 도망을 가셨단다. 과했던 친절은 무단도망을 위해서였다. 이게 무슨 황당한 소리지. 외과는 레지던트 수가 적어서 남은 사람은 펠로우 선생님과 교수님밖에 없는데, 몇 십 명의 입원환자를 두고 주치의가 도망이라니.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았다.    

 

그날부터 나는 지옥의 인턴맛을 보게 되었다. 모든 환자의 주치의와(펠로우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하면 되었지만) 수술 준비와 수술동의서 받기, 수술 어시스트 등의 대부분의 일을 맡게 된 것이다. 펠로우 선생님이 아침 회진 돌면서 말씀하셨다.

"절대 외과 들어오지 마. 저 거지 같은 남자 의사들 사이에서 진짜 힘들어."

인턴 앞에서 울고 싶지는 않으셨을 텐데 눈물까지 흘리시는 모습에 우리나라의 의료계의 민낯을 보는 것 같아 슬펐다. 그날부터 나에게는 숨 쉴 시간도 허락되지 않았다.

     

펠로우 선생님과 함께 교수님 수술보조를 하고 있었는데 교수님이 물으셨다. "00호 환자 있지? 그분 주치의 누구야? 드레싱을 도대체 누가 한 거야?" 아 그분, 기억났다. 내 담당은 아니었지만 내 드레싱 환자의 옆자리에 있던 분. "저는 드레싱을 언제 받을 수 있나요? 수술하고 한 번을 안 오네.."라고 말씀하셨던 탈장 수술을 받은 환자분이셨다. 그때 침대에 붙어있던 주치의 이름을 확인했는데, 치프선생님이셨다. ‘소독하러 곧 오실 거예요.’라고 대답하고 나왔던 기억이 났다. "의국장 선생님입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때까지 그게 그렇게 큰일이 될지 몰랐다.     


하루종일 수술방에서 김밥하나 먹고 병동에 저녁 드레싱을 하러 왔는데, 외과 의국으로 의국장이 나를 불렀다. 의국에 들어가자마자 욕부터 들린다. "야! 인턴, 너 뭐야? 네가 교수님한테 일러바쳤냐? 너 미쳤어?"라고 소리를 지른다. "교수님이 물어보셔서 그냥 대답했을 뿐입니다."라고 했는데 손이 올라왔다. 다행히 다른 선생님들이 말려서 맞지는 않았다. 눈물이 났다. 힘들어도 한 번도 흘리지 않았던 눈물이다. 도대체 내가 뭘 잘못한 거지. 수술한 환자 드레싱 안 해서 상처 곪게 한 게 저리 잘한 일인가. 그 앞에서 욕먹으며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으니 외과 천사 김 선생님이 나를 데리고 나가셨다. 그리고 티슈를 건네며 말씀하셨다. "선생님, 2주만 참아요. 상처받지 말고 2주만 더 참으세요." 역시 소문대로 천사다.     


이후에 나는 치프 뒤로 줄을 선 다른 선생님들에게도 찍혔다. 병동에서는 나를 먼저 콜 했다. 수술방 세 군데에서 나 찾았다. 수술 어시만 들어가면 졸음이 쏟아지니, 더 욕을 먹었다. 그렇게 외과 인턴 생활이 끝나가던 중 우리의 3년 차 선생님이 돌아오셨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 나를 보고 인사한다. "안녕? 안나, 잘 있었어?" 아, 이런 상또라이를 보았나. 나는 웃으며 말했다. "선생님, 저를 버리고 가시면 어떻게 해요. 보고 싶었어요..."


의국장을 들이받은 인턴이었으므로 외과턴 점수는 포기해야 했다. 점수를 위해 살아오지는 않았잖아. 그냥 열심히 하고 그 과정에 만족하며 살아왔지 않아? 하며 씁쓸함을 삼키며 점수생각은 않기로 했다.     


외과 인턴 생활 중 가장 기억에 남는 환자는 몇 년간 욕창으로 누워 계신 80대 할아버지다. 할아버지의 욕창은 엉덩이 뼈가 다 노출될 만큼 근육까지 다 녹아버려 매일 두 번씩 드레싱을 해주어도 썩은 냄새가 진동을 하는 상태였다. 오더는 하루 두 번씩 드레싱 하는 것이었지만 두 번씩 꾸준히 한 인턴은 많지 않았다고 했다.     

 

할아버지 욕창드레싱 첫날, 병변을 열어보니 도저히 숨을 쉴 수 없는 냄새가 진동을 했다. 냄새가 너무 심해 눈을 뜨는 것도 힘들었다. 피고름에 감염이 의심되는 녹색 거즈들. "냄새가 너무 심하죠?"라고 보호자가 민망한 듯 말씀하신다.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내가 맡은 한 달 동안은 하루 두 번씩 꼭 드레싱을 해 드리리라 마음 먹었다. 그리고 매일 식염수로 씻어내고 포비돈 거즈 패킹을 하루 두 번씩 거르지 않고 해 드렸다. 오프인 일요일에도 드레싱을 하고 나가고, 나갔다 들어와서도 꼭 드레싱을 했다. 선생님이 도망가신 동안은 수술준비로 바빴기 때문에 새벽 다섯 시에 드레싱을 했다. 몇 주를 그렇게 드레싱을 하고 나니 냄새도 많이 안 나고 절대 좋아지지 않을 것 같던 병변에 살이차기 시작했다. 생명의 신비였다.     


장기 입원환자라 교수님은 별로 관심 없으신 줄 알았는데 회진 중 말씀하셨다. "한선생이 드레싱 잘해줘서 할아버지 많이 좋아지셨다던데, 보호자분이 너무 고마워하시더라." 그 한마디에 눈물이 핑 돌았다. 보호자분은 내가 드레싱 하러 가도 별말씀 안 하시던 분이셨는데, 역한 냄새를 표시 내지 않으려 애썼던 내 노력을 알아주시니 감사했다. 그거면 되었다. 점수가 뭐가 중요하나 나는 내 할 일을 잘해 냈고 좋아진 환자가 있다. 수술 부위 감염으로 두 달간 퇴원 못하던 여자 환자분도 한달간의 꾸준한 드레싱으로 호전되어 퇴원하셨다. 내가 여기에 도움이 되고 있으면 그걸로 되었다.


하극상 인턴이었던 나는 성적표에 A를 받고 그렇게 외과를 마무리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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