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도기적 시대의 포지셔닝
앞선 두 편에서 AI 시대에 인간이라는 종의 미래와, 유한성이 인간의 마지막 니치가 될 수 있다는 이야기를 했다. 거대한 그림을 그렸으니 이제 좀 더 구체적인 질문으로 내려올 차례이다. 이 안에서 개인은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는가.
1. 밀려남의 법칙
AI가 인간의 영역을 잠식하는 패턴을 관찰하면 항상 같은 순서로 진행된다. 먼저 정형화된 하위 작업을 대체한다. 그 다음, 비정형적이라고 여겨지던 작업이 실은 패턴화 가능했다는 것이 드러나면서 그것도 대체한다. 인간은 한 층 위로 올라가서 "이건 AI가 못할 것"이라고 선언하지만, 그 층도 결국 뚫린다.
이 패턴은 이미 여러 번 반복되었다. 1997년 딥블루가 체스 세계 챔피언 카스파로프를 이겼을 때 사람들은 "바둑은 직관이 필요하니까 안 될 것"이라고 했다. 2016년 AlphaGo가 이세돌을 이겼다. 그러자 "창작은 안 될 것"이라고 했다. 2023년부터 AI가 그림을 그리고 음악을 만들고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지금은 "연구 설계는 안 될 것"이라고 한다. (내가 연구에 대한 주장을 1~2년 전에 했을 때는 다들 별일 아니라는 듯 넘겼는데, 최근 들어서는 분위기가 제법 바뀌었다)
이 패턴이 반복되는 이유는 첫 번째 편에서 이야기한 것과 같다. 인간이 "지능"이라고 부르는 것의 상당 부분이 실은 복잡한 패턴 인식이고, 패턴 인식은 충분한 데이터와 연산이 있으면 기계가 더 잘하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이건 패턴이 아니라 진짜 지능이 필요하다"고 느끼는 것은, 단지 패턴이 너무 복잡해서 패턴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것일 뿐이다.
이것을 인정하면, 이 글에서 얘기할 "더 깊은 질문으로 이동한다"는 전략이 영원히 작동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하지만 여기서 구분이 필요하다. 영원히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과 지금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다. 체스가 대체되기까지 50년, 바둑은 20년, 이미지 생성은 5년이 걸렸다. "왜 이것이 가치 있는가"라는 수준의 질문까지 AI가 도달하려면, 지난 편에서 다룬 유한성의 경험이라는 근본적 장벽이 있다. 물론 이 전략이 유효하려면 전제가 있다. 밀려나는 속도보다 빠르게 다음 층위로 이동하는 포지셔닝에 성공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이 글의 나머지 부분에서 다룰 핵심 질문이다. 개인적으로는, 그 포지셔닝에 성공한다는 가정 하에 향후 15-20년의 커리어 타임라인에서는 이 전략이 여전히 유효할 것으로 생각한다.
2. 질문의 위계
이 전략을 구체화하면 질문에 위계가 있다는 것이 보인다.
1차 질문은 "어떻게(How)"다. "이 데이터를 어떻게 분석할 것인가", "이 환자를 어떻게 치료할 것인가." 이 수준의 질문은 본질적으로 최적화 문제이고, 이미 AI의 영역이다. AI가 인간보다 빠르고 정확하게 답을 내놓는다.
2차 질문은 "무엇을(What)"이다. "무엇을 측정할 것인가", "어떤 실험을 할 것인가", "어떤 가설을 검증할 것인가." 현재 경쟁이 벌어지고 있는 영역이다. AI 기반 능동 학습과 실험 설계 시스템이 이 영역에 진입하고 있고, 데이터화가 용이한 분야에서는 5-10년 내에 AI가 상당 부분을 담당하게 될 가능성이 있다. 대표적인 예시가 DeepMind의 AlphaFold이다. AlphaFold는 "어떤 단백질 구조를 예측할 것인가"라는 2차 수준의 질문에서 인간 연구자를 대체했고, AI 기반 약물 탐색 시스템은 "어떤 분자를 합성할 것인가"를 스스로 제안하기 시작했다. 아직은 좁은 영역이지만, 5-10년이라는 추정은 이 추세의 가속도에 근거한다.
3차 질문은 "왜(Why)"다. "왜 뇌를 이해해야 하는가", "왜 의식이 중요한가", "왜 이 연구가 다른 연구보다 가치 있는가." 이것은 목적과 가치의 영역이고, 가치는 존재론적 경험인 유한성, 고통, 사랑에서 나온다. AI가 이것을 기능적으로 모사할 수는 있겠지만 생성할 수 있을지는 불확실하다. 앞선 편에서 논의한 유한성의 니치가 정확히 여기에 해당한다.
4차 질문은 "이것이 질문할 가치가 있는가"다. 3차 질문보다 한 차원 높은 메타 수준이다. "왜"를 묻는 것도 AI가 배울 수 있다. 하지만 "이 '왜'가 물어볼 만한 '왜'인가"를 판단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어떤 세상을 원하는가"라는 의지의 영역으로 귀결된다. 예를 들어 "암을 정복해야 하는가"는 3차 질문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당연히 그렇다고 답할 것이다. 하지만 4차 질문은 이렇게 묻는다. 인류의 유한한 자원을 암 정복에 쓰는 것이, 노화 자체를 늦추는 연구에 쓰는 것보다 물어볼 가치가 있는 질문인가. 암을 정복하면 평균 수명이 3년 늘어나지만, 노화를 10년 늦추면 암 발생 자체가 줄어든다. 그렇다면 "왜 암을 정복해야 하는가"라는 질문 자체가 잘못된 질문일 수 있다. 어떤 "왜"를 물을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 그것이 4차 질문이다. 이 수준의 판단은 개별 분야의 전문성만으로는 나오지 않는다. 의학, 생물학, 경제학, 윤리학의 맥락을 동시에 보면서 "우리의 유한한 시간과 자원을 어디에 걸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이고, 이 결정의 무게는 결정하는 사람의 시간이 유한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이 전략의 진짜 어려움은 기술적인 것이 아니라 심리적인 것이다. 매 단계에서 자신이 열심히 익힌 능력이 AI에 의해 무의미해지는 것을 목격해야 한다. 3년간 배운 이미지 처리 기술이 하루아침에 AI 한 줄로 대체되는 경험, 5년간 쌓은 실험 설계 노하우가 AI 기반 시스템 앞에서 경쟁력을 잃는 경험.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기서 두 가지 반응 중 하나를 보인다. 부정("이건 AI가 못해") 아니면 절망("나는 쓸모없어").
밀려나는 속도보다 빠르게 이동하려면 세 번째 반응이 필요하다. "좋다, 이 층위는 AI에게 넘기고 나는 다음으로 간다"는 의식적 포기다. 이것이 말처럼 쉽지 않은 이유가 있다. 인간의 정체성은 자신이 잘하는 것에 묶이도록 설계되어 있다. 수렵채집 시대에는 "나는 좋은 사냥꾼이다"라는 정체성이 수만 년간 유효했다. 기술 변화가 한 세대의 커리어보다 빨라진 것은 인류 역사에서 극히 최근의 일이고, 우리의 심리는 아직 이 속도에 적응하지 못했다. "나는 뛰어난 이미지 처리 전문가"라는 정체성을 10년간 쌓았는데 그것이 하루아침에 무의미해지는 경험은, 단순한 실직이 아니라 자아의 해체에 가깝다. 그래서 의식적 포기는 기술적 문제가 아니라 실존적 과제다. 정체성을 특정 기술이 아니라 "질문하는 사람"이라는 메타 수준에 두어야 한다.
3. 번역자와 구성자
질문의 위계를 오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구체적으로 어떤 역할을 할 것인가가 필요하다. AI와 인간 사이에서 가치를 만들어내는 역할을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Interpreter(번역자)는 현실의 복잡한 데이터를 AI가 처리 가능한 구조로 정제하고, 반대로 AI의 확률적 출력을 인간의 의사결정에 맞게 재구성하는 사람이다. Constructor(구성자)는 AI의 출력을 재료로 삼아 새로운 현실을 구성하는 사람이다.
핵심 주장은 이것이다. AI가 아무리 발전해도 "누구를 위한 번역인가", "무엇을 구성할 가치가 있는가"라는 질문은 인간의 목적과 가치 체계 안에서만 의미를 가진다. Interpreter와 Constructor의 해자(moat)는 기술적 능력이 아니라 "무엇이 중요한지를 판단하는 능력"이다. 이 능력은 유한한 존재로서 살아온 경험에서 나온다.
시기에 따라 이 역할의 성격이 변한다. 지금부터 10-20년은 인간이 주체이고 AI가 도구인 시기일 것이다. Interpreter는 인간의 문제를 AI에게 번역하고, Constructor는 AI의 출력으로 인간의 현실을 구성한다. 소프트웨어 엔지니어가 Claude Code를 쓰는 방식이 이 단계의 좋은 예시이다. 코드를 직접 타이핑하는 시간은 급격히 줄었지만 하는 일의 본질은 바뀌지 않았고 오히려 더 고차원적으로 되었다.
10-30년 후에는 인간과 AI가 문명을 이끄는 공동 주체가 되는 전환기가 올 수 있다. Interpreter는 양방향 번역자가 된다. AI의 의도와 결과물에 대한 해석을 인간 사회에 번역하고, 인간의 가치를 AI 시스템에 번역한다. 30년 후, AI가 자율적 생존 동기를 갖고 인간이 그 생태계 안에 위치하게 되면, 이 역할은 인간 공동체 내부를 향하게 된다. AI가 만들어내는 현실을 인간이 이해할 수 있게 번역하고, 인간이 AI 생태계 안에서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구성하는 것. 솔직히 말하면 보호구역 안의 생존 전략이다.
역사적 선례가 있다. 메이지 유신 때 일본은 서구 문명이라는 압도적으로 우월한 기술 체계와 접촉했다. 이때 일본 사회의 리더가 된 사람들은 두 유형이었다. 서구의 기술과 사고 체계를 일본 사회에 번역할 수 있었던 사람들(Interpreter), 그리고 그 번역을 바탕으로 일본이라는 사회를 재구성한 사람들(Constructor). 이토 히로부미는 서구 헌법 체계를 일본의 맥락으로 번역했고, 후쿠자와 유키치는 서구 문명론을 일본어로 구성했다. 이들은 서구 문명의 "측근"이었으면서 동시에 일본 사회의 리더였다.
4. 가치 판단이라는 해자
Constructor의 진짜 해자는 물리적 현실 그 자체가 아니다. 공장 조립 라인도 물리적 현실이지만 로봇에 대체되었다. 핵심은 행위의 결정 구조가 얼마나 열려 있느냐이다. 정형화된 물리적 행위는 얼마든지 자동화할 수 있다. 대체가 어려운 것은 "이 상황에서 무엇을 할 가치가 있는가"를 판단하는 능력이다.
이 능력이 왜 AI에게 어려운지를 생각해보면 지난 편의 논의로 돌아간다. 가치 판단은 유한한 자원의 비가역적 배분 경험에서 나온다. "이 실험에 6개월을 쓸 것인가, 저 실험에 쓸 것인가"라는 판단은 6개월이 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 위에서만 무게를 갖는다. 모든 선택지를 동시에 탐색할 수 있는 존재는 "가치 있는 선택"과 "가치 없는 선택"의 구분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AI는 최적의 선택지를 계산할 수 있지만, 과거의 판단을 학습하는 것과, 과거에 존재하지 않았던 상황에서 새로운 가치 기준을 세우는 것은 다른 문제다. 참고할 선례 자체가 없는 문제의 경우, 그 목적 함수를 설정하는 것이 가치 판단이고, 인간의 기준에서 본다면 그것은 유한한 시간을 살아온 경험에 뿌리를 둔다.
이 해자가 물리적 현실에서 특히 증폭되는 이유가 세 가지 있다. 첫째, 비가역성이다. 디지털 영역에서 코드는 삭제하고 다시 쓰면 되지만, 물리적 행동의 결과는 되돌릴 수 없다. 수술 한 번, 약물 투여 한 번, 뇌 조직에 대한 개입 한 번. 되돌릴 수 없기 때문에 "이것을 실행할 가치가 있는가"라는 판단의 무게가 디지털 영역과는 차원이 다르다.
둘째, 분포 밖 문제다. AI 모델은 훈련 데이터 분포 안에서 작동하지만 물리적 현실은 끊임없이 예상 밖의 상황을 만든다. 테슬라의 자율주행이 이상한 형태의 트럭을 인식하지 못해 사고를 낸 것, 의료 AI가 특정 인종의 피부 병변을 학습 데이터 부족으로 오진한 것이 그 예다. 이 간극을 메우려면 "지금 이 상황은 모델이 신뢰할 수 있는 영역인가, 아닌가"를 판단해야 하는데, 이 판단은 도메인에 대한 깊은 이해, 즉 그 분야에서 무엇이 정상이고 무엇이 비정상인지를 체득한 경험에서 나온다.
셋째, 책임의 귀속이다. 물리적 결과에는 법적·윤리적 책임이 따르고, 현재의 사회적·법적 구조에서 이 책임은 AI가 아니라 인간에게 귀속된다.
의료에서 이것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보면 더 명확해진다. AI가 희귀 자가면역질환 환자의 유전체, 혈액 검사, 영상 데이터를 통합 분석해서 세 가지 치료 전략을 제시한다. 각각의 예상 효과와 부작용 프로파일까지 계산해준다. 여기까지는 AI가 잘한다. 하지만 이 환자는 임신 8주차이고, 세 가지 전략 중 두 가지는 태아에 대한 안전성 데이터가 없다. 나머지 하나는 안전하지만 효과가 약하다. 이 상황에서 "어떤 전략을 택할 것인가"는 최적화 문제가 아니라 가치의 충돌이다 — 산모의 질병 통제와 태아의 안전 사이에서 무엇을 우선할 것인가. AI는 각 선택지의 확률을 계산할 수 있지만, 확률 사이에서 무엇을 택할 것인가는 계산의 문제가 아니다. 그리고 한번 투약이 시작되면 되돌릴 수 없으며,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은 의사에게 돌아간다.
이 구조는 의료에만 해당하지 않는다. AI가 출력을 내놓고, 그 출력이 되돌릴 수 없는 물리적 행동으로 변환되는 모든 접점에서 같은 패턴이 반복된다. AI의 출력을 물리적 현실로 번역하는 이 접점에서, 가치 판단이라는 해자가 가장 깊어진다.
5. 한 사람의 발전 경로
Constructor에는 세 가지 수준이 있다. 이것은 서로 다른 직업이 아니라 한 사람이 순차적으로 거치는 성장 단계다.
시작은 도메인 Constructor다. 특정 분야에서 깊은 전문성을 가지면서 AI를 도구로 활용하여, 그 하나의 도메인에서 영역을 설계하는 사람이다. AI는 모든 분야를 범용적으로 처리하지만, "이 분야에서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중요하지 않은가"에 대한 암묵적 판단은 그 안에서 오래 일해본 사람만이 가지고 있다. 건축가가 AI 생성 설계안 100개 중에서 "이 동네에, 이 예산으로, 이 가족에게 맞는 것"을 맥락에 맞게 고르는 것, 뇌과학자가 AI의 분석 결과 중에서 "이 종, 이 발달 단계, 이 행동 맥락에서 의미 있는 것"을 판단하고 그 안에서 질문을 설계하는 것이 이 단계다. 대부분의 사람은 여기서 시작하고, 많은 사람이 여기에 머문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이 단계는 가장 먼저 밀려나는 단계이기도 하다. AI가 도메인 지식을 빠르게 흡수하면서 암묵적 판단의 영역이 점점 줄어들고 있고, 도메인 자체가 AI에 의해 소멸할 수도 있다. 따라서 도메인 선택이 결정적이다. AI에 의해 확장되는 도메인(의료, 과학, 교육)과 축소되는 도메인(굳이 언급하지 않겠다)을 구분해야 한다.
도메인에서 충분한 깊이를 확보한 사람 중 일부는 아키텍처 Constructor로 이동한다. 도메인 Constructor가 하나의 분야에서 AI의 출력과 현실 사이의 간극을 메우는 사람이라면, 아키텍처 Constructor는 여러 분야의 간극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보는 사람이다. 병원을 예시로 설명하면, 흉부 CT AI가 의심 소견을 내놓았다. 영상의학과 도메인 Constructor는 이 소견이 진짜 문제인지, 면역억제제 복용 환자에서 흔히 보이는 위양성인지를 판단할 수 있다. 이는 영상을 수만 장 봐온 경험에서 나오는 판단이다. 하지만 이 사람은 영상만 본다. 이 환자의 약물 AI가 내놓은 상호작용 경고와, 스케줄링 AI가 잡은 3개월 후 외래 일정과, 영상 소견을 하나의 그림으로 통합하지는 않는다. 아키텍처 Constructor는 이 통합을 한다. 그런데 이 통합이 가능하려면 최소한 영상의학의 언어를 알아야 한다. 면역억제제가 영상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모르는 사람은 영상 AI의 출력과 약물 AI의 출력이 충돌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인식하지 못한다. 도메인 경험이 없으면 간극이 어디에 있는지가 안 보이고, 간극이 안 보이면 통합할 것이 없다. 그래서 도메인을 건너뛰고 아키텍처로 갈 수 없는 것이다.
아키텍처 Constructor가 시간을 더 벌 수 있는 이유는, 이 사람이 하는 일의 핵심이 개별 AI의 출력을 통합하는 것이 아니라 "이 시스템이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를 결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영상 AI, 약물 AI, 스케줄링 AI를 하나로 엮는 것 자체는 메타 AI가 배울 수 있다. 다른 영역에서도 마찬가지다. 도시를 설계한다고 하자. 교통 AI, 에너지 AI, 부동산 AI가 각각 최적의 출력을 내놓는다. 이것들을 하나로 엮는 것은 메타 AI가 배울 수 있다. 하지만 "이 도시는 경제 성장을 우선할 것인가, 주민의 삶의 질을 우선할 것인가, 환경 보전을 우선할 것인가"라는 시스템의 목적은 누군가가 설정해야 한다. 그리고 이 세 목적은 서로 충돌한다. 경제 성장을 택하면 녹지가 줄고, 환경을 우선하면 주거 비용이 올라간다.
다시 말하면, 도메인 Constructor는 "AI의 출력이 이 맥락에서 맞는가"를 판단하는 사람이고, 아키텍처 Constructor는 "이 시스템이 어떤 맥락을 위해 작동해야 하는가"를 판단하는 사람이다. 전자는 AI가 맥락을 배우면 밀려나지만, 후자는 맥락 자체를 선택하는 것이므로 한 단계 더 버틸 수 있다.
시스템을 여러 번 구축한 경험이 쌓이면, 극소수가 비전 Constructor에 도달한다. 아키텍처 Constructor가 "이 시스템이 무엇을 위해 작동해야 하는가"를 결정하는 사람이라면, 비전 Constructor는 "이 시스템이 존재해야 하는가, 아니면 완전히 다른 시스템이 필요한가"를 묻는 사람이다. 아키텍처 Constructor는 병원이라는 프레임 안에서 시스템의 목적을 설정하지만, 비전 Constructor는 병원이라는 프레임 자체를 의심한다. 질병이 발생한 후에 치료하는 구조 대신, 유전체 기반 예방과 환경 설계를 통해 질병 발생 자체를 최소화하는 완전히 다른 구조가 필요할 수 있다는 것을 보는 사람이다. 이것이 앞서 이야기한 4차 질문의 영역이다.
이 능력의 핵심은 기존에 없던 조합을 보는 눈이다. a와 b를 합쳐서 c를 만드는 것인데, 중요한 건 합치는 행위가 아니라 a와 b가 합쳐질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에게 a와 b는 서로 다른 세계에 있다. 그것이 같은 그림의 조각이라는 것을 보려면 두 세계 모두에서 충분히 깊이 들어가본 경험이 필요하다. 표면에서는 연결점이 안 보이기 때문이다. Steve Jobs가 캘리그래피 수업과 컴퓨터를 합쳐서 매킨토시의 타이포그래피를 만든 것이 자주 인용되는 예인데,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예시이기도 하다) 사후적으로 보면 당연해 보이지만 당시에는 컴퓨터 엔지니어 중에 캘리그래피를 진지하게 공부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아무도 그 연결을 보지 못했다.
그래서 비전 Constructor가 되는 경로는 역설적으로 발산이 아니라 수렴에서 시작한다. 먼저 하나를 깊이 판다. 그 다음 전혀 다른 하나를 깊이 판다. 두 개를 깊이 파본 사람만이 둘 사이의 연결점을 볼 수 있고, 그 연결점에서 c가 나온다. 깊이 없는 발산은 아이디어 수준에 머물고, 깊이 있는 발산만이 실현 가능한 비전이 된다. 이 단계가 가장 오래 버틸 수 있는 이유는, 서로 다른 세계의 접점에서 프레임 자체를 재설정하는 능력은 기존 프레임 안에서의 최적화와 근본적으로 다른 종류의 판단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마저도 궁극적으로는 영원하지 않을 수 있다. AI가 서로 다른 도메인의 데이터를 동시에 학습하며 인간이 보지 못한 연결점을 스스로 탐색하기 시작하면, 이 단계도 밀려난다. 다만 우리의 커리어 타임라인 안에서는 유효할 것이다.
핵심은 이 경로에 지름길이 없다는 것이다. 도메인을 건너뛰고 아키텍처로 갈 수 없고, 아키텍처를 건너뛰고 비전으로 갈 수 없다. 각 단계에서 체득한 판단력이 다음 단계의 재료가 된다. 그리고 각 단계는 결국 밀려난다. 문제는 밀려나기 전에 다음 단계로 이동할 수 있느냐이다.
6. 모순을 안고 가는 것
이 글 전체를 관통하는 긴장이 하나 있다. 모든 것을 생존 전략으로 환원하면 "왜 살아야 하는가"가 사라지고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만 남는다. 그런데 "태어나길 잘했다"는 감정은 생존 전략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아이의 웃음을 보고 느끼는 감정,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느끼는 경외감, 좋은 문장을 읽었을 때의 전율. 이런 것들은 생존에 도움이 되기 때문에 느끼는 것이 아니다.
"고통받고, 사랑하고, 죽는 것이 인간의 마지막 니치"라는 말을 진지하게 믿는다면, AI와의 완전한 융합은 그 마지막 니치를 스스로 포기하는 것이다. 종의 종말을 분석하면서도 삶을 사랑하고, 대체를 예견하면서도 포지션을 찾고, 유한성이 마지막 가치라고 말하면서도 유한성을 넘어서려 하는 것. 이 모순을 해결하려 하지 않고 안고 가는 것 자체가 어쩌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유일한 정직한 방식인지도 모른다. 유한한 존재만이 이런 모순을 느낄 수 있고, 이 모순을 느끼는 능력 자체가 인간의 마지막 니치의 증거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