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외주화가 아닌 사고의 증강

질문할 수 있는 사람의 조건

by 최인준

앞선 세 편에서 인간이라는 종의 미래, 유한성이라는 마지막 니치, 그리고 질문하는 사람으로 살아남는 전략을 이야기했다. 거대한 그림을 그리고, 그 안에서 개인의 포지셔닝까지 내려왔다. 이번 글에서는 한 걸음 더 들어가서, 그 포지셔닝을 가능하게 하는 가장 기초적인 조건을 생각해본다. 공부한다는 것의 의미가 바뀌고 있다.



1. 외주화와 증강 사이


AI 사용을 "사고의 외주화"라고 비판하는 목소리가 많아지고 있다. 틀린 말이 아니다. AI에게 질문을 던지고 나온 답을 그대로 가져다 쓰는 사람에게 AI는 외주 업체와 다를 것이 없다. 스마트폰 없이 전화번호를 하나도 못 외우는 것처럼, AI 없이 한 문단도 못 쓰는 사람이 등장하고 있고, 이것은 실제로 퇴화다.


하지만 같은 도구를 들고도 완전히 다른 일이 벌어지는 경우가 있다. 무언가를 알고 싶을 때, 먼저 그것을 사업 같은 형태로 최대한 자세히 구상한다. 누구를 위한 것인가, 왜 이것이 필요한가, 현실적 제약은 무엇인가, 기존 방식으로는 왜 안 되는가. 사업이라는 프레임을 씌우면 추상에 머물 수가 없다. "좋은 아이디어"와 "실행 가능한 구조" 사이의 간극이 즉시 드러나고, 그 간극이 곧 자기가 모르는 것의 지도가 된다. 그 지도를 들고 AI에게 간다. AI가 반박하면 재반박하고, AI가 보강하면 그 보강의 전제를 다시 의심한다. 이 과정이 끝나면 처음의 구상이 완전히 뒤집히기도 한다. 하지만 뒤집힌 것은 결론이지 주도권이 아니다.


이 차이는 3편에서 다룬 질문의 위계와 정확히 대응한다. 외주화는 How 수준에서 멈추는 것이다. "이 데이터를 어떻게 분석해", "이 코드를 어떻게 짜", "이 보고서를 어떻게 써." AI가 답을 주면 끝이다. 질문자의 사고는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증강은 다르다. How는 AI에게 맡기되, What과 Why는 자기가 쥔다. "이 실험을 왜 해야 하는가", "이 사업이 존재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 질문이 물어볼 가치가 있는 질문인가." 이 수준의 질문을 자기 안에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AI는 사고를 증폭시키는 도구가 된다. 없는 사고를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있는 사고를 시험하고 확장하고 정제하는 것이다.


문제는 증강할 사고가 먼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빈 그릇에 AI를 부으면 AI의 모양이 된다. 자기 모양을 가진 그릇에 AI를 부어야 자기 모양이 더 선명해진다. 이것이 외주화와 증강을 가르는 한 끗이고, 이 한 끗을 만드는 것이 공부다.



2. 대학이라는 체제의 해체


그렇다면 현재의 교육 시스템은 이 "자기 모양"을 만드는 데 어디까지 기여하고 있는가. 먼저 인정해야 할 것이 있다. 대학의 체계적 훈련 없이는 도메인 Constructor의 기초 자체가 불가능하다. 3편에서 도메인을 건너뛰고 아키텍처로 갈 수 없고, 아키텍처를 건너뛰고 비전으로 갈 수 없다고 했다. 각 단계에서 체득한 판단력이 다음 단계의 재료가 된다고 했다. 이 판단력의 씨앗은 체계적으로 정리된 기초 지식에서 나온다. 물리학을 모르는 사람이 물리학의 근본적 질문을 던질 수는 없다. 해부학을 모르는 사람이 수술의 가치 판단을 할 수는 없다. 능동적 학습이라는 것도 결국 기초 지식의 토대 위에서만 작동한다. 대학은 여전히 이 토대를 제공하기 위해서 유효하게 작용하고 있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대학 교육의 구조를 보면, 4년에서 길게는 6년, 대학원까지 합하면 10~15년을 학위 하나에 쏟아붓는다.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일의 대부분은 교수가 강의하고, 학생이 받아 적고, 시험에서 재현하면 학점을 받는 사이클의 반복이다. 기초를 쌓는 단계에서 이 구조는 작동한다. 하지만 10년간 이 사이클만 반복하면, 기초는 쌓이되 그 기초 위에서 자기 질문을 세우는 훈련은 되지 않은 채로 졸업하게 된다. 교과서의 How를 익히고, 정해진 What을 따라가지만, Why를 묻는 훈련은 거의 없고, "이것이 물어볼 가치가 있는 질문인가"라는 4차 질문은 아예 교육과정에 존재하지 않는다.


3편에서 Interpreter와 Constructor의 역할을 이야기했다. 이 두 역할의 해자는 기술적 능력이 아니라 "무엇이 중요한지를 판단하는 능력"이라고 했다. Interpreter가 되려면 AI의 출력이 이 맥락에서 맞는지 틀리는지를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Constructor는 "이 분야에서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중요하지 않은가"에 대한 암묵적 판단이 필요하다. 기초 지식은 이 판단의 필요조건이다. 하지만 충분조건은 아니다. 교과서는 이미 중요하다고 결정된 것만 담고 있고, 시키는 공부만으로는 "아직 중요하다고 결정되지 않은 것" 중에서 중요한 것을 골라내는 능력이 생기지 않는다.


대학이 지금까지 제공해온 것을 분해하면 네 가지다. 지식, 네트워크, 자격증명, 연구 환경. 이 중 지식은 AI와 온라인 자원이 이미 대체하고 있다. 네트워크는 산업 커뮤니티가 부분적으로 대체하고 있다. 연구 환경은 대학원 수준에서는 여전히 강력하지만 학부 수준에서는 제한적이다. 남는 것은 자격증명인데, 이것의 가치도 서서히 떨어지고 있다. 고용 시장 자체가 "어디 나왔느냐"보다 "무엇을 만들 수 있느냐"로 이동하고 있고, AI 시대에는 이 이동이 가속된다. 같은 학위를 가진 두 사람 중 한 명이 AI를 증강 도구로 써서 자기 질문을 만들어내고 다른 한 명이 학위만 들고 있다면, 그 차이는 학위로 가려지지 않는다.


결국 대학이라는 단일 기관이 4~6년을 묶어서 모든 것을 제공하는 모델은 무거운 압력 하에 놓여 있다. 기초 지식의 체계적 전달이라는 기능은 남겠지만, 그것만으로는 대학의 현재 규모와 비용을 정당화하기 어려워진다. 신문이 이 해체의 선행 사례다. 20세기 후반까지 신문은 뉴스, 분류광고, 오피니언, 엔터테인먼트를 하나의 물리적 묶음으로 제공하는 모델이었다. 독자는 스포츠 면만 읽고 싶어도 신문 전체를 사야 했고, 구인 광고를 보려는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인터넷이 이 번들을 해체했다. 뉴스는 포털이, 분류광고는 크레이그리스트가, 오피니언은 블로그가, 엔터테인먼트는 유튜브가 가져갔다. 신문사가 사라진 것은 뉴스의 수요가 사라졌기 때문이 아니다. 번들로만 제공하던 것이 개별적으로 더 잘 제공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대학도 같은 구조적 위치에 있다. 지식, 네트워크, 자격증명, 연구 환경을 하나의 4~6년짜리 패키지로 묶어서 제공하는 모델인데, 이 중 개별 기능들이 대학 바깥에서 더 효율적으로 제공되기 시작하고 있다. 다만 신문과 다른 점이 하나 있다. 신문의 번들은 물리적 제약(인쇄와 배송)에 의해 묶여 있었지만, 대학의 번들은 사회적 합의(학위의 신호 가치)에 의해 묶여 있다. 물리적 제약은 기술이 바꾸면 즉시 해체되지만, 사회적 합의는 훨씬 느리게 변한다. 대학의 해체가 신문보다 느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이미 이 해체의 초기 형태가 관찰되고 있고, 이 전환이 점진적으로 일어나면 아무도 "대학이 사라졌다"고 느끼지 못한 채 대학의 실질적 기능이 분산될 수 있다.



3. 사고의 밀도는 어디에서 오는가


대학이 해체되든 변형되든, 하나의 질문은 남는다. "자기 질문을 만드는 훈련"을 누가 시키느냐. 이것이 앞으로의 교육 시장에서 가장 값비싼 질문이 될 것이다.


이 질문에 답하려면 먼저 "사고의 밀도"라는 것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생각해봐야 한다. 같은 주제를 놓고도 어떤 사람은 한 방향에서만 보고, 어떤 사람은 다섯 방향에서 동시에 본다. 그 차이는 머릿속에 얼마나 다양한 프레임이 축적되어 있느냐에 달려 있다. 밀도가 높은 사람은 AI와 대화할 때 AI의 답에 저항할 수 있다. "이건 다른 각도에서 보면 틀릴 수 있다"고 반박할 재료가 있기 때문이다. 밀도가 낮은 사람은 AI의 첫 번째 답을 그대로 수용한다. 저항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사고의 밀도를 만드는 가장 강력한 원천은 경험과 깊은 대화다. 직접 무언가를 만들어보고, 실패하고, 왜 실패했는지를 체득하는 과정. 자기와 전혀 다른 관점을 가진 사람과 밀도 높은 대화를 나누면서 자기 전제가 흔들리는 경험. 이런 것들이 만드는 밀도는 책이나 강의의 그것과 질적으로 다르다.


왜 다른지를 하나의 사례로 설명할 수 있다. 의대생은 교과서에서 심정지 환자의 처치 프로토콜을 배운다. 시험에서 만점을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응급실에서 실제로 심정지 환자를 만났을 때, 보호자가 울부짖는 상황에서, 간호사가 다른 환자의 상태를 동시에 보고하는 와중에, 약물 용량을 계산하면서 흉부압박의 리듬을 유지하는 경험은 교과서의 지식과 완전히 다른 것을 남긴다. 이후 이 의사는 같은 프로토콜을 보더라도 교과서만 읽은 사람이 볼 수 없는 것을 본다. "이 프로토콜은 이상적 상황을 전제하고 있는데, 현실에서는 이 단계에서 병목이 생긴다"는 판단. 이것이 3편에서 말한 도메인 Constructor의 암묵적 판단이고, 이 판단은 교실이 아니라 현장에서 축적된다.


하지만 경험과 깊은 대화에는 구조적 한계가 있다. 접근성이다. 모든 사람이 해당 분야의 현장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아니고, 밀도 높은 대화 상대를 항상 만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여기서 책의 역할이 나온다.


책은 사고의 밀도를 만드는 가장 접근성 높은 도구다. 한 권의 책은 저자가 수년에서 수십 년간 축적한 경험과 사고를 압축해놓은 것이고, 그것을 읽는다는 것은 그 사고의 궤적을 자기 안에서 재현하는 행위다. 직접 경험할 수 없는 세계, 만날 수 없는 사람의 사고를 간접적으로나마 깊이 따라갈 수 있게 해주는 거의 유일한 매체다. 유튜브는 결론을 빠르게 전달하는 데 최적화되어 있고, 숏폼 콘텐츠는 자극을 압축하는 데 최적화되어 있다. 하지만 책은 저자가 왜 그 질문을 던졌는지, 어떤 경로로 사고했는지, 어디서 막혔고 어떻게 돌파했는지를 함께 경험하게 한다. 결론이 아니라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과정을 따라가면서 독자의 머릿속에 일어나는 일이 있다. "나는 여기서 다르게 생각하는데"라는 반응, "이 논리가 맞다면 저쪽에서는 어떻게 되지"라는 확장, "이 전제 자체가 틀리면 어떻게 되지"라는 의심.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 자기 안에서 질문이 발생하는 것이다. 3편에서 비전 Constructor가 되려면 서로 다른 세계를 깊이 파봐야 한다고 했는데, 책은 직접 들어갈 수 없는 세계를 깊이 파볼 수 있게 해주는 통로이다. 생태학 책을 깊이 읽은 사람이 AI 논의에서 니치 이론을 가져올 수 있고, 빅토르 프랭클을 읽은 사람이 유한성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고, 메이지 유신의 역사를 읽은 사람이 기술 격차 문명 접촉의 선례를 볼 수 있다. 이 연결점들은 AI가 알려줘서 아는 것이 아니다. 오랜 독서를 통해 자기 안에 쌓인 것들이, 새로운 맥락과 만났을 때 자발적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4. 소크라테스와 AI 사이에서


사고의 밀도를 가진 사람이 AI를 만나면 흥미로운 순환이 관찰된다. 소크라테스의 문답법은 상대방의 사고를 끌어내는 기술이었다. 소크라테스는 답을 주지 않았다. 질문을 던져서 상대방이 스스로 자기 사고의 모순을 발견하게 했다. 이 방법이 2400년간 최고의 교육 방법론으로 인정받아 온 이유는, 외부에서 주입된 지식과 자기 안에서 발견한 통찰 사이에 질적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 방법이 확장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소크라테스 한 명이 동시에 상대할 수 있는 학생은 소수에 불과하다. 밀도 높은 상호작용이 필요하고, 상대방의 사고 수준에 맞춘 질문을 실시간으로 설계해야 한다. 대학이 강의실 300명에게 동시에 지식을 전달하는 대량 생산 모델을 채택한 것은 소크라테스식 교육의 확장 불가능성 때문이었다. 효율을 택하고 깊이를 포기한 것이다.


AI가 이 간극을 메울 가능성이 보인다. 자기가 먼저 구상하고, AI에게 부딪히고, AI가 반박하면 재반박하고, 그 과정에서 자기 사고의 약한 지점이 드러나고, 그것을 다시 보강하는 순환. 이것은 구조적으로 소크라테스식 문답과 유사하다. AI는 무한한 인내심을 가진 대화 상대이고, 어떤 분야의 질문이든 일정 수준 이상의 밀도로 응답할 수 있다.


다만 소크라테스와 AI 사이에는 근본적 차이가 하나 있다. 소크라테스는 상대방이 틀렸다고 생각하면 끝까지 밀어붙였다. 불편하게 만드는 것이 목적이었다. AI는 다르다. AI는 사용자가 원하는 방향으로 수렴하는 경향이 있다. 만족시키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AI를 소크라테스로 쓸 수 있는 사람은, 스스로 불편해질 수 있는 사람뿐이다. AI가 동의해줄 때 "정말 그런가"라고 다시 물을 수 있는 사람. 이 능력은 AI가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즉 이 순환이 작동하려면 전제 조건이 있다. 소크라테스의 문답이 작동하려면 상대방 안에 끌어낼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 아무것도 없는 사람에게 소크라테스가 질문을 던져봐야, 대화는 공허하게 맴돈다. 이 최초의 점화를 만드는 것이 경험이고, 깊은 대화이고, 그리고 가장 접근성 높은 경로로서의 책읽기다.


경험과 독서를 통해 생긴 자기 질문을 들고 AI에게 가면, 대화가 깊어진다. AI의 반박이 자기 사고의 진짜 약점을 건드리고, 그 약점을 보강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질문이 떠오르고, 그 질문이 다시 경험해야 할 것과 읽어야 할 것을 가리킨다. 경험하고, 읽고, 생각하고, AI와 부딪히고, 다시 경험하고 읽는 순환. 이 순환이 돌아가기 시작하면 그것이 곧 능동적 학습이다.


반대로 이 밀도 없이 AI에게 가면, AI가 제시하는 프레임을 그대로 받아들이게 된다. 자기 안에 저항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때 AI는 소크라테스가 아니라 교과서가 된다. 답을 주고, 학생이 받아 적는 구조. 도구가 교수에서 AI로 바뀌었을 뿐, 구조는 동일하다. 이것은 이미 학계에서 관찰되고 있다. AI를 활용한 논문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패턴이 있다. 구조는 깔끔하고, 문장은 유려하고, 인용도 적절해 보이지만, 논문 전체를 관통하는 고유한 질문이 없다. 형식적으로는 완성되어 있지만 "이 사람은 왜 이 주제를 선택했는가"를 물으면 답이 없다. 선택의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3편에서 Interpreter의 해자가 기술적 능력이 아니라 "무엇이 중요한지를 판단하는 능력"이라고 했다. 이 판단력은 수동적으로 축적되지 않는다. 다양한 세계를 깊이 경험하고, 그 경험들이 서로 충돌하고 연결되는 과정에서 형성된다. 경험이 가장 강력하고, 대화가 그 다음이고, 책이 가장 접근성이 높은 보완재이다. 이 세 가지가 결합되었을 때 사고의 밀도는 가장 두꺼워진다.


다만 이 논의 자체가 과도기적 처방일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경험하고, 읽고, 깊이 사유하는 것이 질문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한 필요조건이라는 주장에는 근거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충분조건인지는 알 수 없다. 아무리 사고의 밀도를 높이고 질문의 위계를 올라가더라도, AI가 그 위계 자체를 무의미하게 만들 가능성은 열려 있다. 2편에서 다룬 "합성 대체재"의 위협이 현실화된다면, 질문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포지션 자체가 의미를 잃는다. 그리고 "경험하고, 읽고, 사유하는 사람이 유리하다"는 주장 자체가, 이미 그런 성향을 가진 사람에게 확증 편향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1편에서 "이 대화 자체가 점진적 전환의 한 장면인지도 모른다"고 했던 것처럼, 이 글이 제시하는 전략 역시 시대의 전환 속에서 뒤돌아보면 하나의 과도기적 처방에 불과할 수 있다. 그럼에도 현재 시점에서 이 처방이 유효하다고 보는 이유는 단순하다. 대안이 더 나쁘기 때문이다. 충분조건이 없다고 해서 필요조건마저 포기할 이유는 없다.



5. 가장 느린 것이 가장 강한 것


2편에서 "고통받고, 사랑하고, 죽는 것이 인간의 마지막 니치"라고 했다. 유한한 존재만이 의미를 생산할 수 있고, 의미는 유한한 자원의 비가역적 배분에서 발생한다고 했다. 사고의 밀도를 만드는 과정은 이 구조의 축소판이다.


한 권의 책을 읽는 데 들이는 시간은 돌아오지 않는다. 그 시간에 다른 책을 읽을 수도 있었고, 다른 일을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 책을 선택했다. 하나의 현장에서 5년을 보내는 동안 다른 현장의 경험은 포기된다. 한 사람과 깊은 대화를 나누는 시간에 다른 사람은 만나지 못한다. 이 선택들의 비가역성이 경험과 독서에 무게를 부여하고, 그 무게가 사고의 밀도로 전환된다. AI는 모든 책을 동시에 읽고, 모든 분야를 동시에 탐색할 수 있다. 하지만 모든 것을 동시에 할 수 있는 존재에게는 어떤 선택도 특별하지 않다. 포기가 없으니 선택의 무게도 없고, 무게가 없으니 밀도도 없다.


AI 시대의 생존 전략을 논의하면서, 결론이 "경험하고, 읽고, 사유하라"가 되는 것은 역설적이다. 기술이 극단적으로 발전할수록 인간에게 요구되는 것이 더 원초적인 것으로 회귀하는 것처럼 보인다. AI가 모든 정보를 즉시 제공하는 시대에, 가장 느리고 비효율적인 방식으로 세계를 소화하는 행위가 가장 강한 경쟁력이 된다.


3편의 마지막에서 "종의 종말을 분석하면서도 삶을 사랑하고, 대체를 예견하면서도 포지션을 찾고, 유한성이 마지막 가치라고 말하면서도 유한성을 넘어서려 하는 것, 이 모순을 안고 가는 것 자체가 정직한 방식"이라고 했다. 여기에 모순이 하나 더 있다. 이 모순을 해결하려는 시도 자체가 모순을 증명한다. 효율성의 논리로 보면 300페이지의 책을 따라가는 것은 낭비다. AI에게 물으면 5초 만에 알 수 있으니까. 하지만 그 300페이지를 따라가는 동안 일어나는 일, 저항하고, 의심하고, 연결하고, 자기 질문을 만들어내는 과정은 5초 만에 얻은 답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답을 아는 것과, 답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변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종류의 결과다.


만약 먼 미래에 AI가 이 글을 읽는다면, 유한한 존재들이 자기 유한성을 무기로 삼으려 했던 기록으로 남을 것이다. 가장 느린 방식이 가장 강한 방식이라고, 포기할 수 있는 존재만이 의미를 만들 수 있다고, 진지하게 믿었던 종이 있었다는 기록. 그 믿음이 맞았는지 틀렸는지는 그때 가봐야 알겠지만, 적어도 그렇게 믿으면서 살아간 시간 자체는 이미 우주에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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