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very Day is a New Day

일본에서 시작된 생존의 감각

by 쿨파스

일본에 처음 갔을 때는 JET 프로그램의 국제교류원으로 일했다. 숙소, 급여, 신분 보장까지 모두 갖추어진 구조 안에서 지냈다. 프로그램 참가자에게는 이미 정돈된 일상이 준비되어 있었고, 나는 그 안에 앉아 차려진 밥상을 받아먹는 손님 같았다. 안정적이고 고마운 환경이었지만, 내가 직접 설계한 삶은 아니었다.


3년이 지나면서 생각이 달라졌다. 이대로 떠나는 건 뭔가 다르다는 감각이었다. 내가 보고 있는 일본은 외국인을 위해 예쁘게 포장해 놓은 일본이었다. 지방 도시의 전통과 환대, 프로그램 안의 안전함은 현실의 일부였지만 전부는 아니었다. 일본이라는 나라를 제대로 알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애초에 일본이라는 나라를 알고 싶어서 일본어를 공부하고 일본학 학위를 땄다. 그리고 그것은 수도 도쿄에 가서 살아보지 않고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정면으로 부딪히고, 때로는 받아들여지지 않으며, 그 안에서 흔들려 보지 않고는 일본이라는 사회를 안다고 할 수 없다고 느꼈다. 그 생각은 결과적으로 틀리지 않았다.


JET 프로그램 종료 후, 일본 취업 자격이 만료되어 일단 캐나다로 돌아갔다. 그리고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받아 도쿄로 향하기로 했다. 부모님은 캐나다 편의점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돌아가셨고 캐나다에는 이미 살던 집도 없었다. 친구 집에 머무르며 워킹홀리데이 비자 수속을 마친 다음 한국으로 귀국 비행기를 타려던 날이 2001년 9월 11일이었다. TV 화면에 세계무역센터가 불타는 장면이 계속해서 반복되었다. 하늘길이 멈췄고, 비행기도, 사람들도 움직이지 않았다. 다행히 에어 캐나다에 근무하던 친구 덕분에 일주일 뒤 다른 편으로 겨우 일본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내 인생의 경로가 잠시 멈췄다가 방향을 바꾼 듯한 순간이었다.


도쿄에서의 첫날 숙소는 외국인이 주로 계약하는 게스트하우스였다. 방에 들어가 오시이레 문을 여니 거기엔 7센티미터는 족히 될 바퀴벌레가 눈앞에 있었다. 그때까지 그렇게 큰 바퀴벌레는 본 적이 없었다. 그날 밤은 좀처럼 잠들 수 없었다. 언제 다시 그 바퀴벌레가 튀어나올까 싶어, 가슴이 쿵쾅거렸다.


생활은 계획대로 되지 않았다. 워킹홀리데이 체류 중 정규직 취업은 쉽지 않았고, 나는 영어 강사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계를 이어갔다. 새벽에는 메이지 유업 우유 배달을 했다. 새벽 5시, 눈이 내리는 골목을 스즈키 에브리나 혼다 액티 같은 일본의 경트럭을 몰고 도쿄 고마고메, 스가모 일대를 돌며 우유를 배달하던 기억이 지금도 선명하다.


나는 이전까지 JET 프로그램에서 국제교류원 자격으로 시청 국제과에서 근무했다. 일본어가 가능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포지션이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JET 참가자는 일본어를 전혀 모르는 미국, 캐나다, 호주, 영국 등지에서 온 원어민 영어 강사들이었다. 도쿄와 주변 자치단체들은 이미 원어민 영어 강사를 일본 내 거주 외국인으로 충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굳이 비싼 JET 프로그램을 이용할 필요가 없었고, 그나마도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 영어 학원과 직접 계약을 맺고 시간당으로 파견받는 형태가 일반적이었다.


나 역시 영어 학원과 계약하여 도쿄 토시마구의 여러 중학교에 파견되었다. 하지만 수업은 시간 단위 계약이라 수입이 일정치 않았고, 여름방학 기간에는 월세조차 내기 어려울 정도였다. 고정 수입이 없는 상황에서, 수업이 없는 시간을 활용할 수 있는 아르바이트를 찾다 보니 결국 우유 배달을 하게 되었다.


영어 강사로 일하면서 내내 마음에 걸렸던 것은, 내가 사실상 '원어민'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나는 한국에서 태어나 고등학생때 캐나다로 이민 간 1.5세였다. 영어 이름을 쓰고 '영어밖에 모르는 사람'인 척하는 일이 반복될수록 내 안의 언어와 정체성 사이에는 늘 어딘가 불편한 틈이 생겼다. 언어는 내 무기이자 도구였지만, 동시에 나를 불완전한 사람처럼 느끼게도 했다.


그 시절엔 매달 마이너스였다. JET 프로그램 때 필사적으로 모은 돈은 점점 줄어들었고, 새로 저축할 수 있는 여력은 없었다. 가족들은 왜 일본까지 가서 그런 고생을 하냐고 했다. 한국으로 들어오라고 했다. 나도 내가 왜 거기 있는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었다. 하지만 그 시간을 버티며 나는 알게 되었다. 이젠 어디에 떨어져도 어떻게든 살아남을 수 있다는 감각. 학위나 경력이 아니라, 땀 흘리고 눈치 보고 버티면서 얻은 생존력. 내 안에 그런 능력이 있다는 걸 처음으로 실감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땀을 흘려서 일하는 일에도 나름의 보람이 있다는 걸 느꼈다. 특히 일이 끝나면 아무것도 집에 가져오지 않는, 깔끔하게 하루하루가 정리되는 일의 매력도 분명히 있었다. 매출 목표도, 프로젝트 마감일도 없는, 그저 정해진 일을 해내고 나면 끝나는 하루. Every day is a new day. 그 단순함이 오히려 마음을 편하게 했다.


배달을 하던 어느 날, 엘리베이터 앞에서 아파트 관리인이 청소를 하고 있었다. 나는 조용히 "오하요고자이마스"라고 인사하고 청소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그 사람이 나를 힐끔 보더니, 다짜고짜 반말로 "뭐하는 거야? 계단으로 가!"라고 말했다. 그 말에 순간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올라왔다. 나는 바닥에 놓인 청소 도구를 그대로 걷어찼다. 관리인은 깜짝 놀랐고, 결국 그 일은 배달 사무소까지 전달되었다. 사무소에 항의 전화가 왔다고 했다. 짤리지는 않았다. 사무소 주인은 조용히 말했다. "마음은 이해해. 하지만 우리는 약한 입장이니까 참아야 해." 그 말이 처음에는 좀 서글프게 들렸지만, 지금 돌아보면 참 좋은 사람이었다. 내 감정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고, 그래도 참고 견뎌야 하는 현실을 설명해 준 사람이었다.


2018년, JET 프로그램 3년, 도쿄에서의 2년 방황기, 그리고 IT업계에서의 15년을 포함한 총 20년간의 일본 생활을 마치고 캐나다로 돌아와 다시 정착을 시도했다. 처음에는 재취업이 쉽지 않았다. 일본에서 지사장으로 일했고, 아시아 지역 총괄이라는 타이틀도 있었지만, 그런 경력은 오히려 독이 되었다. "오버퀄리파이드"—너무 과하다는 이유로 서류조차 읽지 않고 탈락되는 일이 다반사였다. 실제로 100개가 넘는 이력서를 보냈지만, 90% 이상은 아무런 답변조차 없었다. 일본에서는 서류를 검토한 뒤 채용이 어렵다면 정중히 이메일로 고지하는 게 상식이었다. 하지만 캐나다에서는 아무런 응답도 하지 않는 것이 하나의 관행이었다. 매일 아무 소식도 없는 메일함을 확인하면서, 나는 점점 사회로부터 투명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단순히 취업이 안 되는 게 아니라, 존재 자체가 무시당하는 느낌이었다.


그 와중에도 생존은 당장 현실이었다. 집세만 해도 매달 2,500불이었고, 식비와 교통비, 보험 등을 포함하면 최소한 한 달에 4,000불은 벌어야 겨우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래서 우버 운전을 시작했고, 때로는 음식 배달도 했다. 자존심이 상하지 않았다고 말하면 거짓말이지만, 이미 일본에서 정체성을 감추고 우유를 나르던 시절을 겪어봤기에 이 일 역시 또 다른 생존의 연장선처럼 느껴졌다.


2002년 무렵의 그 2년은 겉보기에 아무것도 남기지 않은 시간처럼 보일지 모른다. 돈도 못 모았고, 이력서에 적을 만한 경력도 없었다. 하지만 내 삶 전체를 지탱하는 감각은 그 시절에 만들어졌다. 밥상이 없던 시절, 나는 배고팠지만, 동시에 진짜로 삶을 배웠다. 그 감각은 지금도 내 안에서 살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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