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만 받은 번역료

한국과 캐나다에서 번역 노동의 기억

by 쿨파스

나는 어릴 적부터 책을 좋아했다. 국민학교와 중학교 시절, 집에는 ABE라는 세계 아동문학 전집이 있었다. 책꽂이 전체를 채울 만큼 분량도 많았고, 내용도 참 흥미로운 책이 많았다. 기억나는 이야기 중 하나는 ‘바랜랜드 탈출작전’인데, 캐나다의 북극 지방에서 소년들이 겨울을 견디며 생존하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책 속에서 여러 번 언급되는 “토나카이”라는 동물이 있었다. 어린 나는 ‘토나카이’가 내가 모르는 어떤 북극의 사슴 종류 이름이겠거니 하고 넘겼다. 나중에 일본어를 배우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토나카이’는 일본에서 순록을 뜻하는 말이며, 원래 아이누어에서 유래한 일본어 어휘라는 것을.


이 작품은 캐나다를 배경으로 하고 있으니 원문은 영어였을 것이다. 영어 원문에 “토나카이” 같은 말이 나올 리 없다. 즉, 이 책은 영어에서 직접 번역한 것이 아니라, 일본어판을 다시 한국어로 옮긴 중역본이었다. 번역자는 일본어 가타카나로 표기된 단어를 외래어라고 생각하고 그대로 ‘토나카이’라고 옮긴 것이었다. 더 놀라운 건, 책의 마지막 장에 서울대학교 영문학과 아무개 교수 감수라는 이름이 당당히 찍혀 있었다는 점이다. 그 순간 알았다. 번역은커녕 감수조차 실제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걸. 나는 그때 비로소 깨달았다. 번역이라는 일이, 특히 아동서적이나 교양서적에서는 얼마나 가볍게 다루어질 수 있는지를.


시간이 흘러,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1997년경 한국에 1년 정도 머무르며 일본 만화 번역 아르바이트를 했다. 당시 맛의 달인(美味しんぼ) 같은 유명 작품도 번역된 적이 있었는데, 일본어를 읽을 줄 아는 사람이라면 당황할 만한 오역이 그대로 인쇄되어 있었다. 예를 들어 주인공 가이바라 유잔은 ‘우미하라’, 시로는 ‘지로’, 지명 ‘아카시’는 ‘메이세키’, ‘가나가와현’은 ‘가미나가와현’으로 번역되어 있었다. 일본 지명을 도쿄 옆 요코하마가 있는 ‘가나가와현’조차 제대로 읽지 못한다는 건, 마치 한국의 ‘경기도’를 모르는 수준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오역의 이면에는 일본어 초보자 특유의 감각이 자리 잡고 있었다. 가타카나로 표기된 단어는 무조건 외래어일 것이라는 착각이다. 실제로 일본어에서는 상용한자로 표기하기 어려운 동식물명, 음식, 방언, 일본 고유어조차도 자주 가타카나로 쓴다. 예컨대 ‘토나카이’는 일본어로 순록을 뜻하며, 아이누어에서 유래한 일본 고유 명사다. 그러나 이를 일본어 초급자가 외래어로 착각했기 때문에, 캐나다 북극권을 배경으로 한 영어 소설 속 순록이 일본어식 명칭으로 둔갑하는 어이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문제는 이런 번역이 단지 개인의 실수로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당시의 출판 구조는 제대로 된 감수도 없이 번역자의 잘못된 인식이 그대로 책에 반영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결국 독자는 그런 오역을 평생 진실로 기억하게 되고, 번역자는 번역료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사라진다.


1997년 한국에서 내가 맡았던 번역 일도 마찬가지였다. 원고를 납품하고도 몇 달씩 대금을 미룬다든지, “출판사가 어렵다”는 이유로 계약금보다 적은 액수만 지급되는 일이 잦았다. 결국 나는 원래 받기로 한 금액의 60% 정도만 받고 포기했던 기억이 있다. 항의할 곳도, 계약서를 내밀어 법적으로 대응할 여지도 없었다. 모든 게 구두 계약과 신뢰라는 이름 아래 흐지부지되던 시절이었다. 그때 느꼈다. 이 사회는 번역이라는 노동을 우습게 보고 있구나.


토론토 대학 재학 중, 나는 홍콩계 중국인이 운영하는 일본 TV 콘텐츠 제작사에서 자막 번역과 더빙 스크립트 작업을 몇 년간 맡았다. 흥미롭게도, 그곳에서는 단 한 번도 임금이 늦어진 적이 없었다. 계약은 명확했고, 기한과 보수는 철저히 지켜졌다. 덕분에 나는 대학 시절 만들었던 신용카드 빚을 갚고, 졸업 후 한국에서 체류할 자금까지 마련할 수 있었다. (첫 신용카드였는데 한도는 800달러에 불과했지만, 컴퓨터용 사운드카드와 그래픽카드를 사고 갚을 길이 막막해져서 부모님께 말도 못 하고 매달 최소 결제만 겨우내며 버티던 시절이었다.)


한국, 일본, 캐나다—세 나라를 거치며 나는 번역이라는 노동이 사회마다 얼마나 다른 인식을 받고 있는지를 체감했다. 한국에서는 번역이 가볍게 소비되는 하청 작업처럼 여겨졌고, 감수자조차 무책임한 경우가 많았다. 일본에서는 번역을 엄격하게 다루는 출판사도 많았지만, 지나치게 기계적인 충실함에 집착하여 어투가 어색해지는 경우도 있었다. 반면 캐나다에서의 번역은 콘텐츠 제작의 일부, 창작의 일부로 간주되었고, 작업자에 대한 최소한의 신뢰와 보상 시스템이 작동하고 있었다.


지금 나는 통역 일을 주업으로 하고 있지만, 간혹 번역 작업도 함께 맡는다. 예전 같으면 문서 하나하나를 처음부터 끝까지 정성 들여 옮겼겠지만, 이제는 다르다. 대부분의 번역은 이미 AI가 처리한 상태로 도착한다. 담당자들이 돌아가며 어색한 표현, 일관되지 않은 용어만 정리하면 되는 수준이다. 전체 문장을 처음부터 새로 쓸 필요는 거의 없다.


이따금 이런 생각이 든다. 나는 과연 운 좋게 막차를 탄 것일까, 아니면 이미 도착해버린 종착역에 서 있는 걸까. 통역이라는 일도 몇 년 지나면 AI가 실시간으로 대체하게 될지 모른다. 지금은 아직 기술의 과도기라 사람이 필요할 뿐, ‘실시간 음성 인식 + 자동 통역 + 화자 스타일 보정’이 실현되는 날이 오면, 사람 통역사의 자리는 더 빠르게 줄어들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 순간 누군가의 말을 대신 전하고, 그 의미와 감정을 함께 옮기는 역할을 맡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한 의미가 있다. 그것이, 기계가 아직은 흉내 내기 어려운 ‘여운’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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