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부 – 캐나다 재이민 분투기

처음부터 다시 쌓은 생활 기반과 수많은 시행착오

by 쿨파스

캐나다로 돌아온 뒤, 퇴직금 일부를 사용해 가족 모두가 탈 수 있는 기아 세도나 미니밴을 구입했고, 운 좋게 토론토 북동쪽 마캄 지역에 비교적 괜찮은 조건으로 단독주택을 임대할 수 있었다. 방이 여러 개 있는 널찍한 집이었고, 앞마당과 뒷마당에는 각각 커다란 메이플 나무가 한 그루씩 서 있었다. 집 규모에 비해 임대료가 저렴한 대신, 마당 관리는 전적으로 세입자인 우리가 맡아야 했는데, 여름철엔 잔디를 거의 매주 깎아야 했고, 가을이 되면 상상을 초월하는 양의 낙엽을 갈퀴로 긁어 종이 봉투에 담아 도로변에 내놓아야 했다. 한 시즌에만 120리터짜리 Yard Waste Bag 30봉지를 넘긴 적도 있었다.


집주인은 위니펙에 살고 있는 중국인이었고, 토론토에 사는 그의 조카가 대리인 역할을 했다. 조카는 영어도 유창하고, 꽤 큰 규모의 부동산 개발업을 하는 듯했으며, 그의 아내는 중국계 고객을 대상으로 하는 중개사로, 마캄 일대 곳곳에 얼굴 사진이 들어간 간판이 걸려 있을 정도였다. 나는 캐나다에 막 들어온 상태에서 직장도 신용 기록도 없었기에, 1년 계약을 맺으면서도 6개월 치 월세를 선불로 내는 조건으로 겨우 계약을 체결했다. 캐나다에서 신용이 없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처음 실감한 순간이었다. 신용카드를 만들려고 해도 대부분 거절당했는데, 유일하게 일본에서 사용했던 이력이 이어진 아메리칸 익스프레스만은 발급이 가능했다.


봄이 되면 메이플 나무에서 수액을 채취할 수 있었다. 드릴로 나무에 구멍을 뚫고 튜브를 끼운 다음 병을 매달면 투명한 수액이 졸졸 흘러나왔고, 이걸 졸이면 메이플 시럽이 된다. 실제로 구멍 하나만 뚫어도 수액이 무한정 나와 생수처럼 마실 수도 있었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한국의 고로쇠 수액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었다. 집주인 조카는 혹시 이 집을 살 생각이 있냐고 물어보며 가격을 160만 캐나다 달러라 했고, 나는 순간 어이가 없어졌지만 웃을 수도 없었다. 일본의 네리마 신축 주택과 사이타마의 두 채를 모두 팔아도 그 집값의 1/3이 될까 말까 했고, 융자도 아직 남아 있었으니 감히 고려 대상도 아니었다.


정작 캐나다 생활이 시작되자 가장 먼저 마주한 현실은, 영어가 어느 정도 된다고 생각했던 아내의 언어 능력이 실전에서는 거의 통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특히 인도계, 중동계, 중국계 등 다양한 인종이 섞여 사는 캐나다에서는 억양도 각양각색이라, 아내는 기본적인 대화조차 힘들어했다. 나는 일본에서 근무하면서도 미국 본사 및 동남아 각지와 계속 영어로 일했기에 큰 문제가 없었지만, 그 차이는 매우 컸다. 만약 아내와 아이들만 먼저 캐나다에 왔더라면 얼마나 막막했을지,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


아이들 역시 내가 이민 온 시기보다 더 어렸고, 나는 당시 캐나다에 이미 한국인 친구들이 많았던 환경에서 적응할 수 있었지만, 일본어가 모국어인 우리 아이들은 그런 또래 친구조차 없었다. 일본어 사용자로서 영어를 배우는 것은 한국어 사용자보다 훨씬 어렵다는 사실도 간과하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내가 함께 온 건 정말 다행이었다.


정착 과정은 예상보다 훨씬 복잡하고 손이 많이 갔다. 아이들 학교 등록, 아동수당과 온타리오 건강보험 신청, 어머니의 노인연금 등록까지 모든 절차를 내가 도맡아야 했다. 아내는 지역 웰컴 센터에서 ESL 수업을 시작했지만, 나는 캐나다 시민권자이고 캐나다 대학 졸업자라는 이유로 그런 지원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사실 20년 만에 돌아온 캐나다는 내가 알던 나라가 아니었고, 나 역시 새로 이민 온 사람과 다를 바 없었다.


두 달쯤 지나 구직 활동을 시작했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일본에서 유통업계 데이터 관리 실무를 했던 경험을 살리고자 관리자 이력을 지운 이력서를 만들어 지원했지만, 연락조차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공고에 맞춰 이력서를 커스터마이즈하고 정성껏 커버레터를 써도, 정중한 거절 메일조차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가끔 면접 요청이 와서 기대에 부풀 때도 있었지만, “더 적합한 후보를 찾았다”는 전형적인 멘트가 돌아오면 허탈함이 밀려왔다.


현실적인 지출도 발목을 잡았다. 매달 2,200불의 월세에 광열비, 식비, 보험 등 기본 생활비만으로도 부담이 컸고, 퇴직금과 저축만으로는 감당이 어려웠다. 결국 나는 우버와 리프트 운전을 시작했다. 특별한 자격 없이 바로 시작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현실적인 선택이었고, 외향적이지 않은 나에게도 무난히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손님을 태우며 토론토 일대를 익히고, 간단한 대화를 나누며 하루를 보내는 일상은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다만 3000cc 6기통 미니밴으로 하루 300킬로 이상 운전하다 보니 기름값이 어마어마하게 나갔고, 하루 한 건 들어올까 말까 한 Uber XL 콜은 실질적인 도움이 되지 않았다. 간혹 짐이 많은 손님이나 술에 취한 승객들을 태우는 일도 잦았고, 정신적으로도 피곤한 일이 많았다. 하지만 월 5,000불 이상의 매출을 올려야 생활이 가능하다는 생각에 새벽 4~5시에 시작해 밤늦게까지 일하는 날이 계속되었다.


여름방학이 되자, 아이들과 함께 10일 동안 세도나를 타고 노바스코샤와 프린스에드워드 섬까지 로드트립을 다녀왔다. 비용은 들었지만, 새로운 환경에서 함께한 시간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경험이었다. 일본에 남겨두었던 사이타마의 두 채에서 들어오는 월세는 처음엔 손대지 않으려 했지만, 생활비가 부족해지면서 결국 몇 번은 송금해 적자를 메꿨다. 새로 시작하는 삶은 생각보다 훨씬 많은 체력과 자금, 그리고 인내를 요구했다. 그 모든 걸 버티게 해준 건 가족이 함께였다는 사실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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