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b Title이 없는 사회

일본의 기업 문화와 ‘노력의 가시화’

by 쿨파스

일본 기업 문화는 표면적으로는 질서 있고 정중하며, 내부적으로는 안정적이고 충성도 높은 조직으로 평가받아 왔다. 하지만 실제로 그 안을 들여다보면, 외부 세계의 기업 조직과는 매우 다른 독특한 구조가 존재한다. 특히 “직무 타이틀이 없는 사회”, “성과보다 노력의 태도를 중시하는 평가 방식”, 그리고 “설명 책임이 곧 문서량으로 환산되는” 커뮤니케이션 문화는, 일본 조직이 아직도 20세기형 산업구조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 “비즈니스 애널리스트”는 어디에 있는가?

많은 글로벌 기업에서 직무는 그 사람의 역할과 권한, 책임 범위를 명확히 나타낸다. 명함에는 ‘Business Analyst’, ‘Project Manager’, ‘UX Designer’ 같은 직무 기반 타이틀이 표시되며, 그것은 단지 형식이 아니라 해당 인재의 전문성과 채용 가능성을 평가하는 기준이 된다. 하지만 일본 기업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명함은 “○○부 제2과 과장”이라는 식의 소속 부서 + 직급 조합뿐이다. 이 안에는 그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어떤 기능을 담당하는지에 대한 정보는 없다. 그저 조직 속 위치를 나타낼 뿐이다.

이는 일본식 고용 시스템이 ‘직무형’이 아니라 ‘소속형(メンバーシップ型)’이라는 점에서 비롯된다. 개인은 특정 업무의 전문가라기보다는, 회사의 일원으로서 필요한 곳에 순환 배치되어 ‘충성’하는 사람으로 간주된다. 직무는 고정되지 않으며, 정기적으로 부서 이동이 이뤄지고, 직무 기술서(job description)는 추상적이거나 존재하지 않는 경우도 많다. 이렇게 되면 전문성은 흐릿해지고, 사람은 조직 내 서열로만 식별된다.

■ 평가 기준은 “열심히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일본의 인사평가는 성과지표(KPI)보다 정성적 요소에 의존하는 경향이 강하다. 목표 자체가 모호한 경우도 많고, 그 목표를 어떻게 평가하는지도 명확하지 않다. 대신 자주 등장하는 표현은 “항상 성실하게 일한다”, “야근도 마다하지 않는다”, “팀워크에 공헌하고 있다” 같은 ‘태도 중심’의 평가다. 심지어 “이 사람은 늘 바빠 보인다”는 인상이 승진의 이유가 되기도 한다.

이런 경향은 조직 내부에서 “성과보다는 노력”이 더 중요하게 여겨지는 정서와 깊은 관련이 있다. 일본 사회는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는 미덕을 중시해 왔고, 그것이 조직 내에서도 그대로 반영된다. 문제는 이러한 평가 구조가 실제 성과와 무관하게 ‘성실해 보이는 사람’만이 살아남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점이다. 조용히 일 잘하는 사람은 묻히고, 보여주기식 퍼포먼스가 승진의 전략이 된다.

■ 설명 책임은 문서량으로 환산된다

“설명 책임(説明責任)”은 일본 사회에서 정치, 기업, 행정 전반에 걸쳐 매우 중요하게 여겨지는 개념이다. 결정이나 사건에 대해 납득 가능한 설명을 하는 것이 공적인 책임이라는 윤리 의식은 일면 매우 성숙한 자세다. 그러나 이 개념이 ‘책임 회피’와 ‘면피성 문서화’로 변질되면 문제는 심각해진다.

대표적인 예가 파워포인트다. 일본 기업의 PPT는 문자로 가득 차 있고, 한 장에 수백 자가 들어간다. 이는 발표용 자료라기보다는 사실상 ‘설명용 보고서’를 PPT 형식으로 만든 것이다. 발표자는 발표 내용과 슬라이드를 거의 동일하게 읽고, 슬라이드는 듣지 않은 사람에게도 “설명은 이미 이 안에 다 써 있었습니다”라고 주장할 수 있는 면책용 문서로 기능한다. “이걸로 설명은 끝냈습니다. 나중에 문제 삼지 마세요”라는 무언의 메시지가 담겨 있는 것이다.

이런 문화에서는 구두 설득이나 논리보다 문자량과 기록성, 그리고 ‘설명했다는 형식’이 더 중요해진다. 결국 슬라이드는 사람을 설득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설명 책임을 이행했다는 증거물’로 쓰이게 된다.

■ 학력과 소속 중심의 사회

이러한 문화는 채용에도 그대로 반영된다. 일본에서는 지금도 개인의 실질적 경력보다, 어느 대학을 나왔는지, 어느 회사를 거쳤는지가 훨씬 더 중요하게 여겨진다. 신입사원은 도쿄대, 게이오대, 와세다대 등 학벌 중심으로 채용되고, 경력직 채용에서도 실제 성과보다 ‘전직 회사의 이름값’이 더 큰 역할을 한다. 이는 실력보다는 문맥 속 소속감과 위계질서를 중시하는 문화가 채용에도 강하게 작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 결론: 구조의 문제, 시대의 과제

일본 기업 문화는 단순히 고루한 것이 아니라, 성과주의・전문성・투명성이라는 현대적인 조직 운영의 기본 원칙과 충돌한다. 직무 없는 직장, 태도 중심 평가, 설명 과잉의 문서, 학벌 중심 채용은 모두 “조직 내 서열과 안면 관계를 유지하면서 문제를 피하려는 구조적 방어기제”로 작동하고 있다.

이러한 구조는 평시에는 그럭저럭 굴러갈 수 있지만, 위기 상황이나 변화가 필요한 시기에는 혁신의 발목을 잡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더불어, 젊은 세대나 외국 인재에게는 매력 없는 문화로 비춰진다.


그리고 이 문화가 너무 뿌리깊기 때문에 나는 일본이 근본적으로 변화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이미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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