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년 일본에 처음 갔던 추억 2

17일간의 첫 일본, 그리고 20년의 시작

by 쿨파스

국제교류기금 일본어 연수 센터에 도착하니 전 세계에서 선발된 일본어 성적 우수자는 약 100명 남짓이었다. 한국에서도 2명이 왔고, 나는 금세 그들과 친해져 함께 다니게 되었다. 동생은 인도에서 온 여학생과 가까워졌고, 나는 미국 보스턴에서 왔다는 홍콩계 오타쿠 미국인과 친구가 되었다. 그와 처음 일본 전철을 타고 아키하바라에 갔을 때 그는 엄청난 양의 애니메이션 굿즈를 샀다. 그러나 나는 토론토 홍콩계 상점에서 비싸게 팔리던 아이템들이 일본에서는 너무 쉽게, 싸게 구할 수 있는 걸 보고 오히려 흥미를 잃었다. 대신 1994년 말 발매된 플레이스테이션 1을 찾는 데 집중했지만 품귀 현상으로 구할 수 없었고, 연수 막바지에 아키하바라에서 중고품을 발견하자마자 구입했다. 캐나다에서 누구보다 빨리 PS1을 손에 넣었고, 게임은 대충 고른 ‘철권’이었는데 훗날 대히트작이 될 줄은 몰랐다.


연수 일정은 ‘골든 코스’였다. 도쿄, 교토·나라, 히로시마를 모두 관광버스로 돌았고, 교토·히로시마까지는 신칸센으로 이동했다. 도쿄에서는 신주쿠 도청 전망대, 아사쿠사, 수상버스, 오다이바 등을 둘러봤다. 도쿄 시내를 버스로 이동하던 중 한 번은 일본 우익의 가두 선전차(街宣車)와 스쳐 지나간 적이 있었다. 확성기에서는 “러시아는 북방 영토를 반환하라”라는 구호가 울려 퍼졌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2000년대 이후 혐한 시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수준이었지만, 당시 이를 본 연수생들 사이에는 순간 침묵이 흘렀다. 그때 일본인 인솔자 선생님이 영어로 “저 사람들은 일본의 수치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쾌활하고 영어도 제법 잘하며, 우리를 잘 챙겨주는 사람이었다. 교토에서는 ‘유젠 조메(友禅染め)’라는 전통 염색 기술을 체험했는데, 염색한 천에 이름을 쓸 수 있었고 기본 제공된 물감이 빨간색이었다. 그때 인솔자 선생님은 한국인이 빨간색으로 이름 쓰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미리 알고, 보라색 물감으로 바꿔 주었다. 이런 세심한 배려는 지금도 기억에 남는다.


버스 앞유리에 ‘일본어 성적 우수자 연수’라는 글씨가 크게 붙어 있어, 교토에서 지나가던 일본인들이 “일본어 성적 우수자들이래”라고 수군거릴 때는 조금 민망했다. 저녁에는 숙소 라운지에서 세계 각국 참가자들과 어울렸는데, 미국에서 온 친구들이 일본에 와서도 미국식으로 무례하게 행동해 프랑스 등 유럽 참가자들이 “미국 애들은 예의가 글러먹었다”며 불평하기도 했다. 흥미로운 점은 모두 일본어 성적 우수자임에도 다국적 대화의 공용어는 자연스럽게 영어였고, 영어에 약한 한국·중국 참가자들은 대화에 끼지 못했다는 것이다. 일본어 연수임에도 영어의 국제 공용어 위상을 실감한 순간이었다.


연수 중에는 사이타마현 코오노스시(鴻巣) 일본 가정집에서 1박 홈스테이를 했다. 처음으로 다다미방에서 이불을 펴고 잤고, 저녁에는 직접 준비한 테마키스시를 대접받았다. 고등학생 아들과 초등학교 6학년 딸이 있는 가정이었다. 낮에는 사이타마 고분 공원과 히나 인형 전문점을 구경했다. 마지막 날, 집주인 부자가 오오미야 역까지 데려다주었는데, 역 앞 소프맵에서 최신 컴퓨터와 주변기기를 구경하는 모습이 인상 깊었다. 컴퓨터에 전혀 관심 없는 우리 아버지를 떠올리며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집 아들은 NEC P9801을 갖고 있었고, 내가 예전에 MSX2를 썼다고 하자 “이름은 들어봤지만 써본 적은 없다”고 했다.


연수가 끝난 후, 동생과 도쿄를 더 둘러보기 위해 3일간 체류를 연장했다. 하지만 당시에는 인터넷이 없어 입국 전부터 호텔 예약이 불안했다. 나리타 공항 인포메이션 센터를 통해 신주쿠 워싱턴 호텔을 3박 예약했는데, 연수 도중 일본 물가를 파악하고 보니 꽤 비싼 호텔이었다. 신오쿠보 주변에는 반값 호텔도 많았다. 예약을 취소하려고 전화를 걸었더니 이미 결제된 금액을 환불받으려면 직접 나리타로 와야 한다고 했다. 결국 일요일 시간을 내어 나리타까지 다녀왔고, 절약한 3만 엔으로 PS1 구입 비용을 마련했다.


일본에서 인상 깊었던 것 중 하나는 패밀리마트의 100엔 참치마요 주먹밥과 세일 때 99엔에 팔던 UFO 야키소바였다. 토론토의 헤이세이 마트(J타운 중심지, 현재도 운영 중)에서는 4달러가 넘던 상품이 일본에서는 99엔이었다. ‘일본에 취직하면 혼자 살아도 이런 걸 먹고 살면 되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약 17일간의 첫 일본 방문이 끝나고 캐나다로 돌아온 후, 처음으로 JLPT(일본어 능력시험)에 응시했다. 당시 토론토에서는 1급 시험을 볼 수 없어 미국 뉴욕 컬럼비아 대학에서 응시했고, 첫 도전이었지만 무난히 합격했다. 2년 후 JET프로그램 국제교류원으로 합격해 일본 생활 20년이 그렇게 시작되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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