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 이민 생활 초기의 친구들 1

유년시절의 추억과 인생의 갈림길

by 쿨파스

토론토로 이민 온 첫해, 나는 토론토 동쪽 스카보로(Scarborough)에 살게 되었다. 먼저 이민 온 어머니 지인분이 그곳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마침 근처에 살던 다른 한국인 가정이 업무로 다른 도시로 가게 되면서 집이 비게 되었다. 그분이 우리에게 그 집에 들어와 살면 어떻겠냐고 권했고, 그렇게 이사를 하게 된 것이다. 집 안에는 가구가 그대로 남아 있었고, 심지어 주인이 소유한 캐딜락 승용차까지 차고에 세워둔 채였다. 안방에는 당시 유행하던 물침대도 놓여 있었다.


하지만 스카보로는 한국인이 거의 없는 지역이었다. 영어를 거의 못한 채 고등학교에 편입해 1년 동안 정말 힘들게 지냈다. 그래도 이를 악물고 노력했고, 수학만큼은 반에서 1~2등을 유지했다. 당시에는 Keyboarding이라는 타자 수업도 있었는데, 타자 속도가 빨라 학교 대표로 스카보로 타자 대회에 나가기도 했다.


그 시절, 서머 스쿨 ESL 수업에서 나보다 네 살 많은 일본인 유학생 ‘후미히코’와 같은 반이 된 적이 있었다. 교과서로 배운 일본어를 실제로 써 보고 싶었던 나는, 일본의 어느 지역에서 왔는지 묻고 싶어 “어디서 왔습니까?”를 직역해 “도코데 기마시타카?”라고 말했다. 그런데 전혀 통하지 않아 당황했고, 결국 영어로 “What city in Japan?”이라고 물어 오사카 출신이라는 걸 알았다.


왜 내 일본어가 통하지 않았는지는 한참 뒤에야 깨달았다. 한국어 ‘어디서’는 ‘from’과 ‘at’ 두 가지 뜻을 가질 수 있고, 일본어로 출신지를 물을 때는 from에 해당하는 "카라"를 써서 “도코카라 기마시타카?”라고 해야 한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게 된 것이다. 물론 더 정확히는 “니혼노 도코카라 기마시타카?”라고 말하는 게 좋다. 이 작은 실수가 내게는 의외로 큰 충격이었고, 그 이후로 한동안 일본인 앞에서 일본어를 말하는 데 주눅이 들어, 알아들어도 말이 쉽게 나오지 않는 시기가 꽤 오래 이어졌다. (사실 이정도 실수는 눈치가 빠른 사람은 짐작해서 알아 들을 수도 있는데 후미히코는 아니었던 것 같다.)


영어의 경우는 학교 ESL 수업에서 수많은 이민자 자녀들이 서툰 영어로 버벅거리는 모습을 매일 보아 왔기 때문에, 문법이나 발음이 틀려도 부끄럽지 않았다. 하지만 그 당시 “서툰 일본어”를 말하는 사람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고, 일본인 네이티브 화자들 앞에서 나만 어눌한 일본어를 하는 것에 대한 저항감이 상당히 컸다. 그래서 일본어를 알아들어도 말이 입 밖으로 잘 나오지 않는 시기가 꽤 오래 이어졌다.


1년이 지나 토론토 생활에 조금 익숙해지자, 우리는 집값이 조금 비싸더라도 한인 인구가 많은 노스욕(North York)으로 이사했다. 부모님은 그곳에서 한인이 운영하던 편의점을 인수해 경영하셨고, 나는 노스욕의 고등학교로 전학했다. 스카보로와는 달리 한국인 학생이 매우 많았고, 그때 사귄 친구들이 지금까지 평생 친구로 남았다.


그 시절, 나는 같은 학교 또래 일본인 친구 두 명과도 가까워졌다. 한 명은 일본 기업 주재원의 아들인 J군, 다른 한 명은 초등학교 4학년 때 부모와 함께 캐나다에 온 N군이었다. N군은 이미 캐나다에서 6년을 살았지만 여전히 L과 R 발음을 잘 구분하지 못해 경찰(police)을 ‘포리스’라고 말하곤 했다. 반면, 캐나다 생활이 2년밖에 안 된 J군은 발음이 훨씬 자연스러웠다.


두 사람은 같은 일본인이라 서로도 친했고, 나와 함께 어울리는 일도 많았다. J군은 사교성이 좋아 한국인 그룹에도 잘 섞였고, 간단한 한국어를 배워 한국인들과 축구를 하기도 했다. N군은 비교적 내성적이었지만, 나와 같은 반이 된 후로는 자주 우리 집에 놀러 왔다. 전화를 걸어 “놀러 가도 되냐”고 묻는 일이 잦았는데, 아마도 우리 집에 일본 만화와 게임이 많았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일본어를 이미 독학으로 어느 정도 알아들을 수 있었지만, 서툰 일본어로 말하는 것이 부끄러워 영어로만 대화했다. 용기 내어 일본어로 한두 마디 하면 N군이 장난스럽게 “한번 더 해봐라”라고 놀리는 바람에 더 말하기 싫어졌다. J군은 그런 장난을 치진 않았지만, 일본어로 말할 때면 목소리 톤이 낮아져 영어로 대화할 때와 전혀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나중에 내가 일본에 다녀와 일본어가 유창해진 뒤에도 J군, N군과의 대화는 자연스럽게 영어였고, 두 사람끼리는 일본어를 썼다. 한 번은 J군이 일본에 왔을 때 서로 가족을 데리고 우에노 공원에서 만났는데, 아내와 함께 있어서인지 일본어로 대화를 하게 됐다. J군과 일본어로 얘기한 건 처음이라 묘하게 어색했다.


N군의 집에 처음 갔을 때, 나는 꽤 놀랐다. 가족이 6남매였는데, 지하실에는 남자 형제 셋이 나란히 침대를 두고 함께 쓰고 있었다. ‘일본인은 깔끔하다’는 막연한 이미지가 있었지만, 그 집은 늘 어수선했고 물건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님이 자주 드나드는 집이었고, 나도 그곳에서 여러 일본인을 만났다. 그중에는 일본에서 어학 연수를 온 재일교포 3세도 있었는데, 영어를 전혀 못해 나로서는 일본어를 더 적극적으로 쓸 수밖에 없었다. 결과적으로는 내 일본어 실력 향상에 도움이 된 셈이다.


J군은 공부를 잘해 우리보다 1년 먼저 토론토 대학에 진학했다. 전공은 의외로 삼림학이었고, 부모님과 동생이 일본으로 돌아간 뒤에도 캐나다에 남아 대학을 졸업하고 주립공원 관리 업무를 맡았다. N군은 공부를 무난히 하는 편이었는데, 수학 시험에서 나보다 좋은 성적을 거둔 적도 있었다. 한 번은 폭설로 수학 선생님의 차가 눈에 파묻혔을 때, N군과 함께 눈을 치워 드렸더니 수업 시간에 선생님이 우리를 가리켜 “Heroes”라고 칭찬했던 기억이 있다.


나는 토론토 대학에, N군은 욕 대학에 진학했다. 부모님이 편의점을 운영하시며 캐셔를 구하던 때, 내가 N군에게 제안하자 기꺼이 하겠다고 해 1년 정도 우리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 후 나는 대학 졸업 후 일본으로 떠났고, 캐나다에 남은 J군과 N군과의 연락은 자연스럽게 끊어졌다.


(2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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