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만에 캐나다로 돌아와서 만난 친구들
JET프로그램으로 일본 니가타현에 파견되었을 때, 마침내 오랫동안 품어 온 ‘일본에 가고 싶다’는 꿈을 이루었다. 하지만 그 기쁨도 잠시, 막상 목표를 이루고 나니 다음에는 무엇을 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JET프로그램은 정부가 주관하는 1년 계약직 제도로, 두 번의 연장이 가능해 최장 3년간 일본에 머물 수 있는 조건이었다. 매년 취업 자격을 갱신해야 했고, 시청에서 근무했지만 ‘정식 공무원’이 아닌 비상근 직원 신분이었다. 나를 동료라기보다 ‘손님’처럼 대하는 분위기도 있었다. 월급은 또래의 일본인 직원보다 많았지만, 보너스나 승진 기회는 없었다.
그럼에도 나름대로 적응하려고 노력했고, 결국 3년을 꽉 채웠다. 다만 한국 출신 이민 1.5세로서 ‘캐나다인’ 행세를 해야 하는 어려움은 컸다. 영어 네이티브가 아님에도 네이티브 수준을 기대받는 것이 가장 힘들었다. 당시 인터넷은 아직 보편화되지 않았고, 모뎀으로 접속하는 PC통신이 전부였다. 덕분에 캐나다 친구들과의 연락은 자연스럽게 끊어졌다.
3년이 지나면서 상황이 변했다. 도쿄에 거주하던 아내와 교제를 시작했고, 도쿄에서 함께 살 방법을 찾게 되었다. 그러던 중 JET프로그램을 총괄 지원하는 일본 정부 외곽 단체, ‘자치단체 국제화 협회’에서 프로그램 코디네이터를 모집한다는 공고를 보았다. 취직이 된다면 도쿄의 가스미가세키 빌딩에서 일할 수 있었다.
서류 심사에 합격해 최종 면접까지 올라갔지만, 마지막 순간에 탈락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역시 내가 영어 네이티브에는 미치지 못해서일까’ 하는 자괴감이 들었다. 이로써 일본에서의 취업 자격은 사라졌고, 남아 있을 방법도 없어졌다.
결국 나는 캐나다로 돌아가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받아 다시 일본에 오기로 했다. 그렇게 3년 만에 한 달 일정으로 캐나다에 돌아왔지만, 부모님은 이미 한국으로 이주하신 뒤라 머물 집이 없었다. 다행히 고등학교 시절부터 친했던 일본인 친구 N군이 자신의 집 2층 방을 내주었다. 큰누나는 뉴욕으로 시집을 갔고, 여동생도 일본에 간 뒤 속도위반 결혼을 하는 바람에 빈 방이 생겨 있었던 것이다. N군은 예전에 우리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었기에, 나를 도와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던 듯하다.
당시 한국인 친구들 중에는 한국에 가서 영어 학원 강사로 종잣돈을 벌고 돌아와 노래방을 창업한 친구가 있었는데, 그 노래방이 친구들의 아지트가 되어 있었다. N군 집과도 가까웠기에 나는 한 달 내내 N군의 집과 노래방을 오가며 지냈다. 그 사이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신청했다. 비자 발급 자체는 큰 문제가 없었지만, 일본에 있는 동안 온타리오주 건강보험(OHIP)이 만료되어 건강진단서를 발급받는 데 약간 지장이 있었고, 일본 체류 초기 생활비를 증명하라는 요구가 있었다. 일본 통장에 돈이 있었지만 인정되지 않아, 여행자 수표로 증명하라고 했다. 결국 노래방 친구에게 현금을 빌려 여행자 수표를 만들고 증명 절차를 마친 뒤, 다시 현금화해 친구에게 돌려주었다.
한 달 동안 여러 친구들을 다시 만났다. N군의 집에는 J군이 놀러 온 적이 있었는데, 그는 온타리오 주립공원에서의 일을 그만두고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배우기 위해 다시 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20대 후반에 완전히 새로운 길을 택한 결심이 대단해 보였다. J군의 가족은 이미 일본으로 귀국해 혼자 캐나다에서 고군분투 중이었고, 영주권 취득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그는 “일본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했다. 게다가 몇 년 전부터 시작한 보디빌딩으로 근육질 체형이 되어 있어 예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N군은 욕(York)대를 결국 졸업하지 못하고 중퇴한 뒤, 전문학교에서 전기기사(Electrician) 과정을 밟고 있었다. 여섯 남매 중 한 명으로, 부모가 학비를 대줄 형편이 못 되었기에 OSAP 학자금 융자를 받았고, 그 빚이 상당했다. 반면 나는 부모님이 대학 학비까지는 지원해 주셔서 그나마 형편이 나았다. 고등학교 동창들 중에는 어렵게 토론토대에 들어갔지만 졸업에 실패해 방황하는 이들도 있었다. 전화카드 사업에 손을 대는가 하면, 대학과 취업 코스를 아예 포기하고 부모님의 가게를 돕는 친구들도 있었다.
그렇게 한 달이 흘러,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손에 쥐고 일본으로 떠날 날이 다가왔다. 출발일은 하필 2001년 9월 11일이었다. N군 집 TV는 케이블이 없어 지직거리는 화면이었지만, 뉴욕 세계무역센터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모습이 보였다. 토론토 피어슨 공항에 도착하니 모든 항공편이 취소되어 있었다. 다행히 에어캐나다에서 근무하는 홍콩계 대학 친구가 있어, 일주일 후로 재예약을 해 주었고, 우여곡절 끝에 일본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었다.
(3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