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도 폴더 인사와 나무 상자 입찰 서류
일본에서 일하던 시절, 지금도 가장 강하게 기억에 남아 있는 경험 중 하나는 일본 사회가 중앙정부 관료를 대하는 태도였다. 일본 사회는 한국처럼 “너 몇 살이야?” 같은 나이 중심 규범보다 신분 중심 사회라는 특징이 있으며, 그들이 중앙정부 관료에게 보이는 태도에서 이를 여러 번 실감할 수 있었다.
내가 일했던 미국계 회사의 일본 지사장님은 과거 일본 상사에서 근무하며 마쓰다의 미국 진출을 지원했던 베테랑이었다. 어느 술자리에서 그의 아들 이야기를 들었고, 그 아들이 캐나다 유학을 준비하던 시기에 직접 술자리에 초대되어 만나기도 했다. 그 친구는 게이오대를 졸업하고 환경성에 들어간 20대 중반의 젊은 중앙부처 관료였다. 그런데 나중에 지사장님을 다시 만났을 때 들은 이야기는 꽤 충격적이었다. 그 친구가 지방 도시로 출장을 갔는데, 그 도시의 60대 시장이 직접 기차역까지 마중 나와 90도로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는 것이다. 지사장님은 “저렇게 하니까 애 버릇이 나빠진다”라고 말하면서도, 말투에는 어딘가 자부심이 묻어 있었다. 아무리 중앙부처 공무원이라지만 겨우 1~2년차의 젊은 관료에게 선거로 뽑힌 지자체장이 이렇게까지 예를 갖추는 모습은 한국에서는 상상하기 어렵다.
일본에서 근무하던 동안 이런 장면을 비슷하게 여러 번 봤다. 일본에서 처음 3년간 니가타현의 중견 도시 시청에서 국제교류원으로 일하던 시절에도 나보다 몇 살 많은 중앙부처 파견 관료가 있었는데 그는 시청에서 ‘과장 대우’를 받고 있었다. 지방정부의 과장직은 보통 수십 년 근무한 중견 직원이 맡는 자리인데, 일본에서는 중앙부처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젊은 나이에도 높은 직위를 부여했다. 이는 일본 대기업이 해외 지사에 본사 직원을 파견할 때 본사보다 더 높은 직책을 부여하는 관행과도 비슷한 맥락이었다.
또 서플라이 체인 업계의 데이터베이스 표준화 회의에 경제산업성 관료가 들어오면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90도로 인사하는 장면이 반복되었다. 참고로 그 회의에서도 제조·유통업체는 정회원 자격이 있지만, 내가 속한 IT기업은 정회원 자격이 없어 찬조회원밖에 될 수 없었고 의결권도 없었다. 이런 경험들은 일본에서 중앙정부 관료가 단순한 공무원이 아니라 상당한 권위를 지닌 존재로 여겨지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일본에서는 국가 공무원을 흔히 “오카미(お上)”, 즉 “윗분들”이라고 부른다. 공무원을 공복으로 보지 않고 상전처럼 여기는 태도라고도 볼 수 있다. 게다가 중앙정부를 가리켜 “구니(国)”—나라—라고 부르는 점도 독특하다. 지방정부 정책을 말할 때는 “도쿄도의 정책”처럼 조직 이름을 쓰지만, 중앙정부 정책은 “나라의 방침”, “나라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 같은 표현을 쓴다. 한국이나 미국처럼 “○○ 정부”라는 표현은 거의 쓰지 않는다.
내가 시청에서 근무하던 시절에도 전화를 받을 때 “○○시 기획과입니다”라고 했지, “○○시청입니다”라고 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시(市)라는 말이 행정 조직뿐 아니라 시민과 지역 전체를 포함하는 개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위화감이 컸다. 하지만 시청 직원들은 자신이 곧 ‘시 전체’를 대표한다고 느끼는 듯했다.
그런데 이렇게까지 대접받는 일본 중앙부처 관료들을 실제 그들의 근무 현장에서 보았을 때는 전혀 다른 충격을 받았다. 농림수산성, 경제산업성 등 중앙부처 사무실은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낙후되어 있었다. 오래된 철제 책상, 색 바랜 서류 캐비닛, 바닥까지 쌓인 종이 문서들, 변변한 회의실조차 없는 환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한 번은 경제산업성 담당자와 중요한 미팅을 해야 했는데, 사용할 회의실이 없어서 복도 옆 작은 테이블에서 미팅을 진행했다. 단순한 잡담이 아니라 예산과 정책이 걸린 중요한 회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정도 환경밖에 없었다.
한일 갈등 시기에 한국 언론이 “한국 정부 고위 관계자가 일본에서 작은 창고 같은 방에서 맞이받았다”고 비판한 적이 있다. TV 화면에 나온 장소는 내가 경제산업성을 방문했을 때 사용했던 공간과 거의 똑같은 분위기였다. 정작 내가 경제산업성 관료들과 실제로 일을 할 때는 대부분 노무라종합연구소(NRI)의 요코하마 사무실에서 만났다. 일본 중앙정부의 사무실보다 민간 연구소의 회의실이 훨씬 현대적이고 정돈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2006년 NRI와 함께 경제산업성 사업 입찰에 참여했던 경험도 지금 생각하면 아이러니하다. 당시 내가 근무한 회사는 전자입찰 솔루션을 만드는 회사였는데, 정작 경제산업성의 실제 입찰은 출력한 서류를 나무 상자에 넣어 제출하는 방식이었다. 인터넷 기반 전자입찰 시스템을 만드는 사람이 정부 입찰에 제출할 때는 종이 서류를 들고 가서 나무 상자에 넣고 돌아오는 장면을 직접 경험해야 했던 것이다. 그 모습은 지금 떠올려도 우스꽝스럽다.
이런 다양한 경험을 통해 일본의 디지털 전환이 느린 이유가 단순히 기술력의 문제가 아니라, 업무 방식과 사고방식이 여전히 전근대적 관행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점을 자연스럽게 깨닫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