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공정 제안서
제안서가 도착했다.
말도 안 되고, 어처구니없고, 불합리하기 짝이 없는 제안서다.
하지만 나는 기쁜 마음으로 그 제안서를 다시 받아들었다.
“아빠, 할 말이 있어요. 염치는 없지만 이야기해도 될까요?”
아들이 조심스레 말을 건넨다.
다시 무언가를 이야기하고 싶다는 눈빛이다.
“아빠, 제가 게임을 잘하는데요. 친구들이랑 하면 자꾸 튕겨 나가요.
노트북으로는 게임을 제대로 할 수가 없어요.”
가끔 시험을 마치고 나면 PC방에 들러 게임을 하는 아들.
하지만 집에서는 늘 “이건 안 돼요, 저건 느려요.”
결국 사양 좋은 컴퓨터를 사달라는 요청이 돌아왔다.
나는 조건을 걸었다.
“학원을 빠지지 않고, 약속한 기간 동안 성실히 다니면 새 컴퓨터를 사주마.”
하지만 결과는 실패.
아들은 변명하지 않고 자신의 실수를 담담히 인정했다.
그리고 몇 달 후, 다시 제안서를 내밀었다.
“이번에도 같은 조건입니다.”
나는 웃으며 말했다.
“이미 계약이 한 번 파기됐잖아. 조건은 당연히 달라져야지.”
새로운 제안서는 이렇게 정리되었다.
‘학원을 빠지지 않는 것은 기본.
숙제까지 모두 해 가야 한다.’
아들은 고개를 갸웃하며 말한다.
“아빠, 이건 좀 불공평하지 않습니까? 처음 약속과 다르잖아요.”
하지만 세상 모든 협상에는 수정이 따르기 마련이다.
최근의 정상회담처럼,
서로 밀고 당기는 치열한 조정 끝에
새로운 제안서가 완성되었다.
아들의 제안서는 여전히 불합리했지만,
나는 고마웠다.
그 속에는 스스로 해보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조건은 단지 그 의지를 붙잡기 위한 작은 장치일 뿐이었다.
요즘 들어 아들은 부쩍 자랐다.
“아빠, 저 진짜 잘하지 않습니까?
학원도 안 빠지고, 숙제도 다 하고 있어요.
숙제하다 보니 학원도 일찍 마쳐서 좋아요.
시간 남아서 시험 공부도 해볼까 해요.”
그 말에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내 다락방으로 기어 올라와 장난치는 아들.
이젠 너무 커서 장난이 버겁지만,
그 무게가 사랑스럽다.
가끔 심심할 때면 내가 먼저 장난을 걸기도 한다.
“썩 물러가라!”
그럼 아들은 익숙한 미소로 도망친다.
새로운 도전은 또다시 시작된다.
이번엔 왠지 성공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이 불합리한 제안서가 참 고맙고 사랑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