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생활은 내게 ‘어른답게 나이 드는 법’을 배우는 시간의 연속이었다. 앞서 어른이 된 동료들과 하루 중 대부분의 시간을 함께 했지만 생각보다 ‘어른스러운 어른’, ‘배우고 싶은 어른’을 만나기는 쉽지 않았다. 오히려 나이에 걸맞지 않은 태도와 언행을 훨씬 더 자주 마주하게 되면서 당혹감을 느끼곤 했다.
그렇게 시행착오를 겪으며 결국 내가 배운 것은, 인간의 생이란 끊임없이 자기를 고쳐나가고 배워나가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인지하고 나이 들어가느냐, 아니면 주관에 사로잡혀 자신만이 정답이라 여기며 살아가느냐. 이 두 갈래의 선택이 어른다운 어른을 만드는 갈림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동안 바라본 전자의 길을 걸어가는 어른은, 뒤따라 오는 사람들에게 배움의 대상이 되어주었다. 허둥대지 않도록 지혜를 주고 용기를 주었으며 자신의 고통을 그들에게 물려주지 않으려 애썼다. 나는 이들을 보며 나이 드는 것은 멋진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이구나를 느꼈다. 반면 후자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은 오늘의 문장처럼 배움을 멈춘 채 늙어가는 사람이라는 정의를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닮고 싶지도, 배우고 싶지도 않았다. 그 사람이 세상에서 많은 지식을 갖추고 있다고 해도, 높은 지위에 있다고 해도 그것은 어른의 명패를 가슴에 다는 것과 전혀 상관이 없었다.
성장하며 남자 어른과 대화해본 경험이 많이 부족했던 내게, 그들 틈에서 겪는 사회생활은 혼란의 연속이기도 했다. 담배를 피울 때 나를 꼭 데려간다든지, 부모님의 직업이 무엇인지를 캐내어 거짓 소문을 낸다든지, 함부로 여성 차별적인 발언을 하는 등의 상식 이하의 행동들은 내 사회생활의 첫 포문을 열었다. 어린 시절 트라우마를 안겨준 자들의 공통점 또한 남자 어른이었기에 그들 틈에서 성장하는 것은 많은 정신적 에너지를 필요로 했다. 혼자만의 보이지 않는 싸움을 하며 내 안의 틀을 깨기 위해 노력했지만 결코 쉽지 않았다. 내가 속한 환경은 오히려 편견을 더 가중시켰고, 그들을 남성이 아닌 사람 자체로 받아들이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하루는 상사가 일하는 와중에 나를 불러 아버지에 대해 물은 적이 있다. 부모님이 이혼한 것인지 아니면 아버지가 돌아가신 건지를 조용한 사무실에서 큰 소리로 당당하게 물어보는 그를 보며, 나는 이 상황이 꿈이길 바랐다. 질문에 이어 그는 소위 빽이라는 것을 아냐며, 부모는 한 사람의 빽이다 라는 말을 뱉었는데 격이 한참 낮은 말을 듣고 그의 눈을 빤히 쳐다보았던 기억이 난다. 이 사람이 나와 비슷한 또래의 아버지라는 사실에 의구심이 들었고 무엇인지 모를 자격지심이 이 사람을 그 나이가 되도록 멈춰두게 했나 생각해보게 되었다. 결론적으로 내가 제출한 인사기록사항은 아주 쉽게 팀원들에게 노출되었고 그 결과 나는 토하고 싶을 만큼 역겨운 질문과 대답을 마주해야 했다. 사적인 사항을 공유한 팀장과 웃으며 질문을 던진 그는 확실히 무례했다. 나는 그들을 통해 ‘진짜 어른’이 되지 못하고 그저 늙어버린, 모자란 사람의 민낯을 보았다. 그리고 동시에 내가 정의해온 무례함에 대한 범위를 아주 크게 확장시킬 수 있었다.
생각해보면 이때 딱 한 번, 사회생활을 하다 아버지가 없다는 것이 실감 났던 것 같다. 그가 보고 싶거나 의지하고 싶어서가 아닌, 그냥 빈자리를 만든 당신 탓을 하고 싶었던 것 같다. 또는 물어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대부분의 남자 어른들은 이런 건가요?’라든지 ‘사회생활이 원래 이런 건가요?’, ‘왜 나를 괴롭히는 거죠?’ 같은 질문을. 그러면 ‘그 사람들이 문제야. 도를 넘었네’, ‘너는 아무 문제없어. 귀한 존재야’라는 이어지는 대답을 듣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내게 일어난 충격적인 그 상황 이후로 2년가량이 흘렀다. 참 감사하게도 이제는 그 기억과 어린 시절 남자 어른들 사이의 트라우마가 나를 힘들게 하지 않는다. 시간이 흐른 것도 있겠지만 좋은 남자 어른들과 일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기면서 짙은 편견을 희미하게 만들 수 있었다. 더불어 나의 힘인 신앙생활 덕분에 상처 또한 점점 정리가 되었고 비슷한 상처가 있는 사람을 포용할 수 있는 마음의 자리가 생겼다. 앞서 진짜 어른이 되지 못한 그들이 보여준 행동과 말을 구태여 내가 꼭 잡고 있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것들을 모조리 모자란 그들 몫으로 돌려주었다.
내가 적어도 그들보다는 더 나은 어른이 이미 되었다는 것은 확신할 수 있다. 내게는 아버지가 없었지만 그 자리를 채우고도 남는 엄마의 사랑이 있었다. 성적으로 상처를 준 악마 같은 남자 어른들이 내 마음에 오랜 상처를 남겼지만, 그것을 아물게 하고도 남을 신앙과 곧은 길을 알려준 사람들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 내가 기쁠 때도, 정신적으로 힘들 때도 늘 곁에 있어준 오빠와 사랑스러운 여자 친구들, 따뜻하고 지혜로운 여자 어른들이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내 나름대로의 산을 넘고 나니, 배우고 싶고 존경스러운 남자 어른들이 편견 없이 보이기 시작했다.
오늘의 문장은 그동안 이해되지 못했던 어른의 세계를 되돌아보게 했고 그 안에서 내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깨닫게 도와주었다. 이미 서른이 되어, 사회에서 제 역할을 하고 있지만 나는 여전히 너무나 부족하다. 육체적으로 다 자란 것과 무관하게, 아니 오히려 육체는 이제부터 더 노화하며 앞서 생을 살아가는 어른임을 온몸으로 드러내겠지만, 나는 끝없는 배움과 깨우침으로 ‘진짜 어른’이라는 자리를 유지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스스로에게 말해주고 싶다. 죽을 때까지 학생으로 남아 배우는 것에 억울해할 것 없다고. 지금 이 순간 우주도 팽창하고 있고, 지구도 열일하고 있으며 자연 만물의 성장과 함께 세상은 더 좋게 변화되고 있다. 그 속에 속한 인간인 나라고 별반 다를 바 있을까.